고엽제, 다우 케미컬, 몬산토, 다이아몬드 알칼리 상대로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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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존재를 부정하고 '가스통'을 들었나?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고엽제전우회와 에이전트 오렌지

기사입력 2010-06-24 오전 11:12:53

 

전우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고엽제란 "인류 역사상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인 다이옥신(dioxin)이 함유되어 있는데 (중략) 다이옥신이 얼마나 독성이 강하냐 하면 치사량이 0.15그램인 청산가리의 1만 배, 비소의 3천 배에 이르는 독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다이옥신 1그램이면 사람 2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지구상에서 독성이 가장 강한 독극물이다. 이것은 잘 분해되지도 않을뿐더러 용해도 되지 않아서 인체에 극히 적은 량이 흡수되었다 해도 점차로 몸속에 축적되어 10년~25년이 지난 후에도 각종 암, 신경계 손상, 기형유발, 독성유전 등의 각종 후유증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고엽제 피해자는 왜 발생했는가? 전우회 홈페이지의 설명을 들어보자.

"베트남 전쟁기간 중 베트콩의 은둔지와 무기 비밀수송로로 이용되어온 정글을 제거하고 시계청소하기 위해, 또 베트콩 경작지 농작물 제거를 위해 1960~1971년까지 베트남 국토의 15퍼센트에 해당되는 60만 에이커의 광범위한 지역에 2000만 갤런의 고엽제를 살포하였다. 그 중 80퍼센트에 해당하는 1600만 갤런의 고엽제를 한국군 작전지역에 살포하였다."

한국 정부는 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 사이 연인원 31만 명의 군인을 베트남전쟁에 보냈다.

▲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공중에서 고엽제를 살포하고 있는 장면 ⓒ미 공군박물관

아무런 주의나 경고도 없었던 고엽제

전우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고엽제 사용에 관한 별다른 지시나 주의사항도 없었고, 특히 비행기로 공중 살포 시에는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고 고엽제가 쏟아지는 곳을 쫓아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더 맞으려 했다. 부대 주변에서 제초작업을 하는 병사들은 고엽제 가루를 철모에 담아서 맨손으로 뿌리기도 했다. 작전 기간 중에는 흐르는 물을 수통에 담아서 거기에 소독약 몇 알만 넣어 마셨다.

이러다 보니 그 고약한 다이옥신은 우리 참전 용사들의 눈, 코, 입, 피부 등을 통해 아무런 여과 없이 전신에 숨어 축척 되었다. 이와 같은 피해는 국적에 관계없이 미군을 위시한 모든 나라의 장병들이 모르는 사이에 많은 양의 다이옥신을 몸속에 축적시켜둔 채 전쟁은 끝났다.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뿌렸던 고엽제가 10~25년이 지난 후 부메랑이 되어 이와 같이 우리 노병을 죽이고 있다."

미군 화학전의 일환으로 살포된 고엽제

고엽제전우회가 말하는 고엽제는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로 미군이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남에서 제초전(除草戰, herbicidal warfare)의 일환으로 살포한 맹독성 제초제다. 제초전은 화학전의 일환으로 적이 먹는 식량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적이 숨는 식물계를 파괴하는 전쟁 방식을 말한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화학전을 벌였고, 그를 위해 사용한 무기가 에이전트 오렌지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미국 정부가 에이전트 오렌지의 위해성을 전쟁 당시 이미 파악해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베트남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480만 명의 베트남 국민이 에이전트 오렌지에 노출되었고, 그 중 40만 명이 죽거나 장애인이 되었다. 그리고 50만 명의 신생아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남한에도 뿌려진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 개발의 단초를 개척한 사람은 미국의 식물학자인 아더 갈스턴(Arthur Galston)이다. 미국의 일리노이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1943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2차 대전 중에는 미국 해군성의 '천연자원 담당관'으로 복무하다가 1946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제대했다.

일찍부터 에이전트 오렌지의 위험성을 깨달은 그는 1965년부터 미국 정부에 사용 중지를 요청하는 로비를 벌였고, 베트남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걸고 당선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1년 마침내 사용을 금지시켰다. 아더 갈스턴은 2008년에 죽었다.

미국 정부는 1940년대 중반부터 화학전의 일환인 제초전을 실험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세계 각지에서 실험을 거듭했고, 실전 투입은 1961년 8월 10일 베트남에서 처음 실행되었다.

그런데 에이전트 오렌지가 베트남에만 뿌려진 게 아니었다. 인접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에도 무차별 살포되었고, 대한민국의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에도 뿌려졌다.

2000년 7월 대한민국 국방부는 '고엽제가 사용된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의 범위에 관한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에 따르면, "①남방한계선에 설치된 철책에서 남쪽 또는 북쪽으로 100미터까지의 지역, ②남방한계선에 인접하여 설치된 관측소·지휘소 기타 주요 군사시설의 주변지역, ③남방한계선에 설치된 철책 주변에 있는 전술도로에서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30미터까지의 지역"에 에이전트 오렌지가 살포된 것으로 인정되었다.

고엽제전우회가 "1967년 10월 9일부터 1970년 7월 31일 사이 대한민국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에서 군인이나 군무원으로서 복무하거나 고엽제 살포 업무에 참가하고 전역퇴직한자"를 지원 대상으로 보는 것에 미루어보면, 베트남전쟁이 한창이고 북한 특수군의 청와대 습격 등 남북관계가 최악이었던 1960년대 후반 남방한계선 주변에 집중적으로 뿌려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지난 1991년 월남전 참전을 했던 호주의 한 교민에 의해서 최초로 고엽제란 병명을 알게 되었고, 1984년 미국ㆍ뉴질랜드ㆍ호주의 월남전 참전 군인들은 고엽제 피해 보상을 위하여 미국의 제약회사와 협상을 한 결과 1억8000 달러의 고엽제 기금을 설치하기로 하고, 그 보상지급이 이미 종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실로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정부의 처사에 불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우리 정부에서는 월남전 참전 고엽제 피해자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짜 책임자들에게는 물어나 보았나?

외국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에이전트 오렌지를 만든 미국의 제약회사 다우 케미컬, 몬산토, 다이아몬드 알칼리를 상대로 벌인 소송에서 이긴 게 1984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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