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공급 내 마음대로..푸제온

그들이 저지른 '수요공급 살인 사건'

[기고] 환자의 필요를 무기로 삼는 제약 업체들

기사입력 2008-10-07 오전 7:52:37 프레시안

 

현재 한국에는 약 5000명의 에이즈 감염인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모두 죽음을 눈 앞에 둔 환자들일까. 그렇지 않다. "에이즈=죽음"이라는 등식이 깨진 지 이미 오래 됐다. 물론, "적절한 치료제가 제 때 공급돼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낳은 성과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에이즈 감염인들은 이런 성과에서 배제돼 있다. 치료제를 생산하는 제약업체가 한국에 공급을 중단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약가가 낮다는 게 이유다. 초국적 제약회사인 로슈가 기존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들을 위한 약인 '푸제온' 공급을 중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 에이즈 감염인은 로슈 측의 푸제온 공급 중단 조치로 실명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이윤 동기가 생명을 짓누른 경우인 셈이다.
  
  
  <수요 공급 살인사건>은 경제학자 윌리엄 브라이트(William Breit)와 케네스 엘징거(Kenneth G. Elzinga)가 쓴 '소설로 읽는 경제학'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이 추리소설 시리즈의 주인공 헨리 스피어맨(Henry Spearman)은 탐정이 아니라 경제학자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의사결정은 경제학의 법칙에 따라 이루어지며, 범죄는 합리적이고 일반적인 경제법칙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경제학 교과서에서 나오는 다양한 경제법칙들에 근거해 범인을 잡는다.
  
  의약품 시장의 '보이는 손'
  
  비단 소설 속의 이야기일까? 합리적이고 일반적인 경제법칙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행동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악스러운 일을 '상식'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다. 에이즈 치료제 푸제온(Fuzeon [일반명 : Enfuvirtide])의 국내 공급을 담당하는 한국 로슈의 대표이사 울스 플루어키거(Urs Flueckiger)다.
  

▲ 지난 3일, 보건의료 단체 활동가들이 프랑스 파리에 있는 로슈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에이즈 치료제 공급 거부하는 '로슈' 규탄 국제공동행동

  그는 지난 7월 3일 국내 시민단체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의약품 공급에 관한 문제는 해당 국가 국민이 해당 의약품을 구매할 능력이 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는 로슈의 기존의 입장(<약업신문> 5월 21일자 "한국로슈, 3만원이면 푸제온 공급가능")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소비자의 구매 능력, 즉 "수요에 따라 공급이 결정된다"는 그의 논리는 일견 맞다. 문제는 의약품 시장의 수요·공급 곡선이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시장경제의 그것, 즉 우상향의 공급곡선과 좌상향의 수요곡선이 교차점을 만드는 모습과는 아주 다르다는 점이다.
  
  의약품에 대한 수요는 가격이 요동을 쳐도 요지부동이다. 때문에 의약품의 가격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는데, 푸제온과 같은 신약은 보통 한 제약회사가 독점 생산한다. 필수적인 재화가 독점 시장에 놓이면 '보이지 않은 손'이 수요와 공급을 인도하지 못한다. 재화의 가격과 생산량은 독점기업의 '보이는 손'에 좌지우지 된다.
  
  의약품 시장에서 "공급은 수요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선별하고, 창출하며, 심지어 없애기까지 할 수 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인 한국에서 연간 약 2만 달러의 비용이 드는 약값을 감당하기 어려워, 푸제온의 가격 인하를 요구했더니 한국 로슈의 대답은 '공급불가'였다. 그리하여 푸제온은 국민건강보험에 등재된 필수의약품이면서도 2004년 시판허가 이래 한국에서 한 주도 공급되지 않고 있다.
  
  한국의 한 에이즈 환자는 제 때에 푸제온을 공급받지 못해, 지난 2006년 말, 의사에게 시한부 인생 선고까지 받았으며, 결국 한쪽 눈이 실명되고 말았다.
  
  플루어키거는 그 환자의 면전 앞에서 이 상황이 독점가격을 감당 못하는 한국 환자들의 구매능력 탓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다.
  
  플루어키거가 절대 알 수 없는 것들
  
  의약품의 독점가격이 '상식'이 되고,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환자를 '죄인'으로 만든 이 황당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특허이다. 특허는 발명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 즉 독점적 권리이다. 독점을 시장경제의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는 공정거래법에서도 특허는 적용의 예외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특허를 통해 과학기술의 발전과 공유를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지식기반경제론이 세계 경제의 키워드가 되면서, 특허는 '발명'보다는 '독점'에 방점을 찍게 된다. 제약산업은 이러한 흐름의 가장 큰 수혜자이다. 신약 개발에 관련된 기술을 특허로 독점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시킨다. 1980년 이래 미국 내 제약산업은 순이익면에서 군수산업과 은행업을 제치며 독보적인 선두를 지켜왔다는 사실이 그 방증이다.
  
  그 시작은 레이건 정부가 들어선 1980년, 미국 상원을 통과한 베이-돌 법(Bayh-Dole Law)이었다. 법안은 세금지원을 받은 연구 결과가 공공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대학이나 기업에서 특허를 출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는 결국 과학 기술 연구 풍토를 상업화시키며, 특허 출원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대학의 교수들은 세금을 지원받아 이룬 성과를 응용하기 위해 작은 바이오 기업을 설립했고, 이를 마케팅 할 능력이 있는 거대 제약회사에게 특허를 팔았다. 푸제온도 이 과정을 그대로 거쳤다. 최초 개발은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지원을 받은 듀크 대학교의 연구팀들이 이뤄냈으며, 이들은 '트리리스(Trimeris)'라는 바이오 기업을 설립했고, 로슈는 푸제온의 생산 및 판매 파트너가 되었다.
  
  7월 3일 간담회에서 플루어키거는 푸제온의 가격은 연구개발비에 대한 보상이라고 이야기 하고, 구체적인 비용은 자신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1993년 6월 푸제온의 최초 특허인 제5,464,933호가 출원되고, 1998년 약의 대량 생산 기술이 특허 출원된 이후인 1999년 1월에야 로슈는 트리메리스와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한다. 로슈가 푸제온의 연구개발에 지원을 한 것은 기껏해야 2002년 7월에 발표된 제3상 연구였다.
  
  반면, 가장 많은 시간이 필요한 전임상(preclinical) 연구를 포함하여 그 전의 모든 연구 개발 단계에서 공공영역의 지원은 절대적이었다. 8개의 연구가 국립보건원의 직·간접적인 관리 하에 있었고, 5개의 연구는 비영리기관인 하워드휴즈의학연구소(Howard Hughes Medical Institute)의 지원 하에 이뤄졌다. 3개의 연구는 해외의 공공기관이 지원했다. 2003년 3월 푸제온이 미국 FDA의 승인을 받기 직전에 트리메리스로부터 특허를 사들인 것이 로슈가 한 일의 전부이니, 푸제온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돈이 들어갔는지 플루어키거는 알 턱이 없을 것이다.
  

▲ 지난 3일, 프랑스 파리에 있는 로슈 건물 앞에서 벌어진 시위. ⓒ에이즈 치료제 공급 거부하는 '로슈' 규탄 국제공동행동

  우리의 필요를 그들의 무기로 만드는 정부
  
  1980년 베이-돌 법을 시발점으로, 1995년 체결된 무역관련지적재산권협정(TRIPs)을 거치면서 제약회사는 특허를 통해 의약품 개발의 전 과정에서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1987년 최초의 에이즈 치료제인 '지도부딘(AZT)' 이후 수 십 종의 에이즈 치료제가 개발되고 에이즈는 당뇨고혈압과 같은 만성질환처럼 다스릴 수 있게 되었지만, 에이즈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은 오히려 해마다 300만명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아프리카 국가를 중심으로 한 제3세계 국가들은 2001년 'TRIPS 협정과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선언의 내용은 공중보건 보호조치를 위해 각국 정부의 자율권 보장으로, 주된 목적은 '강제실시(Compulsory License)'의 현실화이다. 강제실시란 특허권자가 아닌 정부나 제3자가 정부의 승인을 얻어 특허약과 똑같은 약을 생산·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특허로 인한 제약회사의 시장독점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셈이다.
  
  한국의 특허법에도 강제실시와 관련된 규정이 존재한다. 특허법 제106조 특허권의 정부수용과, 제107조 재정에 의한 통상실시권 설정 규정이다. 4년 동안 국내에서 판매되지 않고 있는 푸제온의 강제실시 여부에 대해 보건복지가족부의 대답은 둘 중 하나다. "특허청의 소관이다." 아니면, "일단 특허는 존중되어야 한다."
  
  약제급여조정위원회에까지 올라간 백혈병 치료스프라이셀 약값을 결국 한 알에 55,000원이라는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으로 결정했을 때 "제약회사가 공급을 거부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늘여놓았던 복지부였다. 제약회사가 환자들의 필요를 무기삼아 공급 중단을 운운하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특허를 국민의 건강권보다 더 존중한 나머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를 내던지고 있는 꼴이다. 강제실시 발동은 고사하고, 의지조차 입에 담지 못하는 복지부를 보다 못해서, 환자들과 시민단체들이 직접 강제실시를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로슈가 필수 약제 푸제온의 공급을 거부한 상황이 침묵 속에서 4년 동안이나 지속된 것은 그 약의 수요가 가난한 에이즈 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나라의 국민이 그리고 정부가 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로슈의 또 다른 무기, 타미플루
  
  이 사회가 약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는 측면에서 푸제온의 문제는 다른 약에도 반복될 것이다. 약이 없어서 죽는다는 이야기가 못 사는 나라에서 혹은 에이즈 환자에게서만 나오라는 법은 없다.
  
  일례로, 2001년 7월, 한 항만 노동자가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말라리아 치료제인 정맥 주사염산 퀴닌을 구하면 쉽게 나을 수 있었다. 염산 퀴닌 주사제는 '국가 비축용 희귀 의약품'에 속해 정부가 항상 100명 분량의 약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끝내 치료제를 구하지 못했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말라리아와 같은 열대 질병 치료제는 제약회사의 생산 기피로 말미암아 약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로슈가 전세계적으로 독점 생산하는 유일한 AI 치료제 타미플루(tamiflu)는 더욱 심각하다. 우리나라는 세계보건기구(WHO) 권장량인 '인구의 20%'에 한참 못 미치는 2%, 약 120만 명 분량만 확보된 상태다. 타미플루는 여러 나라의 주문이 밀려서 로슈가 생산량을 잘 못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강제실시권을 발동하여 인구의 20%가 먹을 수 있는 분량을 비축하는 방법이 전 세계적으로 논의되었다. 위기감을 느낀 로슈는 국내에서는 2005년 11월에 타미플루를 공동으로 생산할 국내업체를 찾는다며, 강제실시 여론을 잠재웠다. 물론, 아직까지 국내의 제약업체가 타미플루를 생산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는다.
  
  특허법 제106조에 의하면 주무부처 장관은 비상시에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특허에 대한 강제실시를 발동할 수 있다. 강제실시는 무조건 특허청 소관이라 생각하는 복지부는 타미플루의 강제실시가 필요한 때에, 과연 '특허권을 존중하지 않는' 결정을 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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