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탈냉전으로 인한 아․태지역의 전략환경 변화는 이 지역의 이해관계 당사자들에게 새로운 인식과 전략을 모색하게 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와 러시아의 약화, 필리핀에서의 미군 철수는 이 지역에 있어서 힘의 공백을 초래함으로써 중국은 보다 적극적인 세력확대정책을 추진하게 되었고, 이를 견제하기 위한 미․일간의 새로운 안보동맹체제의 구축은 중국과 러시아로 하여금 전략적 제휴를 모색케 하는 등 세력확대를 둘러싼 강대국간의 협력과 갈등은 새로운 질서형성을 둘러싼 전환기적 불안정성을 더욱 증대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중국의 팽창주의적 해양정책은 아세안(ASEAN,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을 비롯한 이 지역의 이해관계 당사국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중국은 지정학적 성격으로 인하여 그 세력확대는 기본적으로 남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데, 특히 탈냉전으로 인하여 중․러관계가 정상화되고 북방으로부터의 위협은 현저히 감소된 반면, 남방으로부터의 위협과 해양권익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됨으로써 남중국해로의 남진을 보다 적극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남진정책 대상이 되고 있는 남중국해와 말라카(Malacca)해협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해상교통과 군사전략상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석유와 천연가스 등 매우 풍부한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서 도서영유권분쟁을 빚고 있는 관계당사국은 물론이고, 전통적으로 이 지역에 커다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미국과 일본 등 역외 강대국들의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위협과 압력에 시달려 온 동남아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중국의 정책이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대응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응책은 군사력 증강을 포함한 자체 역량 강화와 함께 역외 강대국을 끌어들임으로써 남진정책을 둘러싼 중국과 아세안의 갈등은 아․태지역 평화의 최대 시험대가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중국의 남진정책과 그에 따른 아세안 국가들의 대응양식은 동남아는 물론이고 아․태지역 전반의 질서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점에서 이들과 적지 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갈등의 양상과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남진정책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 향후 지역질서의 형성과 관련한 중국과 아세안 관계를 전망해 보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하여 우선 중국의 남진정책이 어떠한 배경과 목적을 갖고 있으며, 그 구체적 실상은 어떠한 것인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여기에서는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것처럼 남진정책이 단지 중국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인 성격의 것인지 아니면 세력확대를 위한 공세적인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그들의 주장과 실제의 행태를 함께 분석하고자 한다. 이어서 이러한 중국의 정책에 대해서 아세안은 어떠한 인식을 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어떠한 대응전략을 모색하고 있는가를 대내외적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검토해 본다. 그리고 끝으로 중국의 남진정책을 둘러싼 이러한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가 향후 어떠한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전망해 보고자 한다.
Ⅱ. 중국의 남진정책 배경
1. 탈냉전과 전략환경의 변화
중국의 남진정책은 기본적으로 탈냉전으로 인한 전략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하고 있다. 냉전시대 동아시아의 해양질서는 미국의 필리핀 슈빅(Subic)만 해군기지와 클라크(Clark) 공군기지, 그리고 소련의 베트남 캄란(Cam Ranh)만 해군기지와 다낭(Da Nang) 공군기지가 대체적인 세력균형을 이루는 상태였는데, 냉전종식과 더불어 양국이 이 지역에서 철수하면서 힘의 공백상태가 초래되었고, 이러한 공백을 이용하여 중국, 일본, 인도 등 지역 강대국들의 세력확대경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중국은 1990년대초 소련이 붕괴하고 러시아와의 협력관계가 증진됨으로써 4,300㎞에 달하는 중․러국경지역에 대한 위협이 현저하게 감소됨으로써 지상군의 인적, 물적 자원을 해․공군력에 전용하여 남진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1997년 6월 30일 일본의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방위청장관은 “중국은 배후의 러시아 국경에서 분쟁이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다. 인민해방군이 더욱 줄어들지 모르나 해군과 공군에는 엄청나게 힘을 기울이고 있다”(문화일보, 1997/07/05)고 적절히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볼 때 이러한 중국의 정책은 점증하는 해양으로부터의 위협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를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협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탈냉전시대에 전개되고 있는 미국의 대중국 견제전략이라고 하겠다. 냉전시대에는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이 존재하였기에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협력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지만, 소련이 붕괴하고 중국이 부상함으로써 미․중관계는 필연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미국은 1995년 2월 ‘동아시아․태평양전략보고서’(EASR, Security Strategy for East Asia-Pacific Region)를 통해 이 지역에 10만명의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겠다고 발표하였고, 동년 6월에는 대만의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의 미국방문을 허용하는 등 관계격상정책을 추진하는가 하면, 동년 8월에는 베트남과의 국교를 정상화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견제를 강화하였다. 나아가 1996년 4월에는 ‘미․일안보공동선언’(US-Japan Joint Declaration on Security)과 그 후속조치인 1997년의 ‘방위협력가이드라인’(Guidelines for US-Japan Defense Cooperation)을 통하여 기존의 미․일동맹관계를 한층 강화하였는데, 중국은 이 새로운 동맹체제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가 자신을 견제하고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적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와 함께 일본은 경제력을 이용하여 동남아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이들과 정치안보적 협력까지도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향후 일본이 이 지역 최대의 적대국으로 부상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Manning 1994, 48-51). 사실상 중국은 일본의 거대한 경제력에 부응하는 정치적 영향력의 증대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으며, 1991년 일본 의회에서 PKO법안이 통과된 것을 그러한 군사적 모험주의와의 경쟁을 의미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Chang 1998, 61-62).
더욱이 중국은 대만의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보다 적극적인 해양정책을 전개할 필요를 인식하여 왔다. 대만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본토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인식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대만에서는 중국과 대등한 주권을 가진 실재로서 독립하여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 졌다. 그리고 대만의 안전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미국을 비롯한 외국과의 관계를 확대하는 한편, 대만과 주변해협을 지키기 위하여 국방력 현대화에 박차를 가해 왔다. 이처럼 대만의 독립요구가 점차 증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96년 3월 대만해협의 위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외부세력이 중국과 대만의 갈등에 개입할 수도 있다. 따라서 중국은 내정문제인 대만문제에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는 하는 동시에 대만의 독립 추구활동을 저지시키고 중국이 의도하는 재통일과정에 대만이 참가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해․공군력의 강화를 바탕으로 한 보다 적극적인 해양정책을 추진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만약 중국이 대만을 합병하게 된다면 중국은 대만을 거점으로 이용하여 태평양으로의 남진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2. 남중국해의 전략적 가치
중국의 당과 군의 지도자들은 탈냉전과 더불어 지상위협은 현저하게 감소한 반면, 해양주권과 해양권익을 보호해야 할 필요성은 크게 증대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FBIS-CHI, 1993/02/24, 29). 바로 이러한 현실적 인식에 기초하여 남진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필요는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중국은 남중국해의 도서들에 대한 자신의 영유권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모든 도서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서 후한(後漢)시대의 사료에서부터 당(唐)․명(明)시대의 항해기록, 19세기 외국출판물에 명시되어 있는 중국인의 활동기록에 이르기까지 각종 증거물을 제시하면서 자신의 영유권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대만․베트남․말레이시아․필리핀․브루나이도 역시 남중국해의 도서 전체 또는 일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과 함께 특정한 도서에 대해서는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중국의 영해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으며, 이를 묵과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1) 요컨대 중국이 남중국해로 남진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영유권을 지키기 위해서 불가피한 방어적 조치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영유권문제는 남중국해의 경제적․전략적 가치와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특히 중국의 고도경제성장에 따른 에너지 확보의 시급성은 남중국해의 자원개발을 위한 남진정책의 필요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 5위의 원유생산국이지만 지속적인 성장에 따른 에너지수요의 급증으로 인해 1994년에는 처음으로 원유수입국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은 스프라틀리(Spratly, 중국명 南沙)군도에 미화 약1조달러의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신강성 유전의 개발이 완료되고 나면 이 지역이 자원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 될 것이며, 다음 세기 중국인의 생존공간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 인식하고 있다. 남중국해에 매장되어 있는 약 110억 배럴에서 160억 배럴에 이르는 막대한 양의 석유는 중국의 경제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적으로 중요한 천연자원이기 때문이다.(Qingxin 1998, 60; Castro 1995, 82) 이와 관련하여 규마 후미오 일본 방위청장관은 1997년 6월 “중국은 어떻게든 석유를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며, 스프라틀리군도나 센카쿠열도(중국명 釣魚島)에 석유가 있다면 이를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것”(문화일보, 1997/07/05)이라고 주장하면서 에너지확보를 위하여 중국이 남진할 것으로 보았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개방정책과 대외무역의 급속한 신장으로 해상교통로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중국의 개방된 모든 도시와 경제특구가 자국의 18,000㎞에 이르는 해안선을 따라 위치하고 있고 국가발전에 있어서 해양이익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Kim 1998, 341 ; Bert 1993, 327). 해로(sea lane)는 내륙교통과 운송의 주요수단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외무역의 85%이상이 해로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은 내륙용 선박을 포함하여 총 3,800만톤에 40만척 이상의 선박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000척은 원양상선이다(FBIS-CHI, 1993/03/02, 37). 향후 중국의 무역이 증가함에 따라 해상교통로의 보호는 중국해군의 주요 임무가 될 것이며, 이 경우에 공해상에서 상선을 보호하는 임무도 포함될 것이다. 특히 남중국해는 태평양과 인도양 사이를 통과하는 상선들의 주요 해로이며 전략적 가치도 크다. 파라셀(Paracel, 중국명 西沙) 군도와 스프라틀리 군도는 칸톤(Canton), 홍콩, 마닐라, 싱가포르를 연결하는 해로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군도들의 지정학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Smith 1994, 276). 따라서 중국은 남진정책을 통하여 해로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 절실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Ⅲ. 중국의 남진정책 추진
1. 해양전략의 변화
중국이 남진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탈냉전과 더불어 그들의 해양전략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중국의 전통적인 해군전략은 연안방어를 중점으로 하는 ‘연해방어전략’이었으나, 탈냉전과 더불어 ‘근해방어전략’으로 방어종심을 확대하면서 해군현대화와 원양해군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2) 이러한 근해방어전략에로의 변화는 몇 가지의 중요한 인식과 판단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근해방어는 대만과 스프라틀리군도와 같은 근해 도서들에 대한 방어뿐만 아니라, 연안지역 전역에 대한 방어를 추진함으로써 해양방어를 효과적으로 확대할 수 있고 둘째, 해양이익을 보다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데, 특히 아․태지역에서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셋째, 중국에 대한 해군봉쇄를 효과적으로 막거나 격퇴시킬 수 있고, 적의 심해 통신망을 쉽게 차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해와 근해항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고, 핵심지역의 해양운송을 보호할 수 있다. 넷째, 대규모 기동전투를 용이하게 함으로써 잠재적 적을 격파하거나 지연시킬 목적으로 내외부접경지역의 전투작전을 결합시킨다면 중국군사력을 유지하는데 효과적일 수 있다. 끝으로 연안방어작전과 협조체제를 이루어 해양기동작전의 수행을 용이하게 할 것이다. 더욱이 여러 전략해역에서 해군력의 기동성을 용이하게 하고, 보다 효과적인 상호지원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이다(Hwang 1997, 239). 결국 중국의 근해방어전략은 아․태지역에있어서 지역해양세력으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중국의 야망을 나타낸 것인 동시에 해군을 중국외교정책의 수단으로 삼고자 한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목적에서 추진되고 있는 중국의 원양해군전략은 1990년대 이후 원양해군력 강화 방침을 더욱 체계화해서 ‘해상 다층․종심 방위전략’을 수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중국은 연안 경제특구에 대한 대만이나 미국 등 가상적으로부터의 해상공격을 원천 방어하기 위해 첫째, 해안선으로부터 150해리 근해에 이르는 해역을 향해 연안으로부터 발사되는 단거리미사일․포함․소형미사일정을 배치하고 둘째, 200해리까지는 함재 헬기를 탑재한 미사일호위함을, 그리고 셋째, 스프라틀리군도와 한일해협까지의 외곽에는 미사일잠수함과 해상공격기 등을 3단계로 배치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 지고 있다(한겨레신문, 1997/01/07).
한편 중국의 남진정책은 핵잠수함의 작전해역을 확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1997년 1월 5일자 홍콩의 빈과일보는 중국 핵잠수함부대 정귀격 사령관의 말을 인용하면서 중국의 핵잠수함들은 1996년 3월 대만과의 양안(兩岸)위기 때 대만해협에 핵잠수함을 출동시켜 전술훈련을 실시하면서 핵공격능력을 과시한 바 있으며, 현재는 아세안과 영유권분쟁중에 있는 스프라틀리군도, 일본과 분쟁이 일고 있는 센카쿠열도, 대만해역은 물론이고 태평양상의 시사군도까지 활동범위에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한겨레신문, 1997/01/06).
이와 같이 중국의 원양해군전략은 탈냉전과 더불어 일관되게 추진되어 왔는데, 최근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미국 방문에서도 양안통일과 관련 무력사용 불포기의사를 천명한 가운데 거듭 밝히고 있으며, 스윈성(石雲生) 해군사령관 역시 “중국은 군사과학과 기술로 원양해군전략을 추진해 다른 군사강국들과의 격차를 줄이고 해양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을 발전시킬 것”(세계일보, 1999/04/23)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대만은 물론이고 인접한 아세안 국가들의 우려를 증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2. 남진의 수단: 해․공군력 증강
중국의 남진정책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해군과 공군력이며, 따라서 중국은 해군현대화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력 증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해군력강화’3)를 위한 중국의 정책은 국방예산에 있어서 최우선순위를 부여하면서 추진되고 있는데, 그 핵심내용은 구형함정의 폐기와 신형합정의 대체, 잠수함세력의 확장, 항공모함의 도입 내지 건조 및 기동함대의 운영 등이다.
중국 해군은 우선 남진정책에 있어서 그들의 임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구형함정을 과감히 폐기하고 신형함정으로 대체하고 있는데, 1970년대에 소개된 루다(Luda)급 재래식 구축함을 폐기하고 이미 1990년대 초반에 4,500톤급의 유도미사일 구축함 루후(Luhu)호, 유도미사일 프리킷함 지앙웨이(Jiangwei)호, 저공정찰기 호우신(Houxin), 호우지안(Houjian), 해안경비정 후루다오(Huludao)호, 재급유함 다윤(Dayun)호, 그리고 새로운 수륙양용 공격함 등을 비롯한 다양한 새로운 모델의 군함들을 취역시켰다(Kim 1998, 345; 강영오 1996, 45). 또한 중국은 1996년 12월 리펑(李鵬)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크루즈미사일을 장착할 수 있는 7,200톤급의 최신 전함 2척의 구매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군의 기술 수준을 10년 정도 앞당길 수 있게 되었으며, 공해상에서의 작전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경향신문, 1997/01/16). 현재 다수의 중국군함들은 사거리 80-95㎞에 이르는 HY-2(C-201) 크루즈 미사일을 장착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신형 함정들은 32-40㎞거리의 목표물을 보다 더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는 JY-1(C-801)미사일을 장착하고 있다(Chang 1996, 354).
나아가 중국은 현재 아시아 최대인 잠수함 전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이는 주로 3가지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다. 즉 첫째는 신형잠수함의 구입과 개발이고, 둘째는 구형 로미오(Romeo)급 잠수함의 개량형인 명(Ming)급의 성능개량사업이며, 셋째는 핵추진 잠수함 분야로서 전략미사일 잠수함의 차세대형 개발을 포함하고 있다(Jane's Defence Weekly, 1995/05/13, 18). 중국은 현재 전략미사일을 갖춘 시아(Xia)급 잠수함(SSBN)과 핵공격 능력을 갖춘 한(Han)급 잠수함을 보유하고 있는데, 구형 위스키(Whiskey)급 잠수함을 과감히 폐기하고, 로미오급과 명급 잠수함의 개량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전체 보유 수는 감소하였으나 잠수함전력은 크게 강화되었다.4)
이와 같이 남진을 위한 중국의 해군력 강화정책은 최근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항공모함의 도입 및 건조계획에 의해 더욱 확실히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항모 건조계획안은 이미 1989년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에서 채택되었으며, 1991년 전해군공작회의(全海軍工作會議)에서는 21세기초까지 최초의 항모를 건조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중국이 항모의 보유를 서두르고 있는 징후는 항모 배치의 준비를 위하여 대련, 상해, 심강에 있는 군항의 확장공사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김경민 1996, 13-14.). 미해군정보국(ONI)은 중국이 대만에 대한 군사압력을 강화하고 원유수송로의 안전확보를 위해 오는 2010년까지 항공모함을 자체 건조키로 하는 한편, 최신예전투기와 첨단무기를 중심으로 군사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어 2005년경에는 대만해협의 군사력 균형이 중국 쪽으로 기울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조선일보, 1997/04/06). 물론 중국이 보유하는 최초의 항모는 경항모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나, 2000년초에 2만톤급의 경항모를 보유하게 되어도 그 전략적 의미는 매우 크다. 즉 경항모는 해양에서의 함대방어 대잠전 및 공중지원 협동작전 등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남중국해에 대한 통제력 확보는 물론 대만해협의 주요항구를 봉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항모중심의 기동함대 보유는 영유권분쟁이 일고 있는 스프라틀리군도의 분쟁해결에 중국의 주도권을 강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한편 중국은 공군력 강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공군력 현대화를 위하여 이미 1992년 러시아로부터 수호이27(SU-27) 전투기 26대를 구입한 것을 시작으로 1995년 12월까지 총 72대를 도입했으며, 현재 초기 도입분 26대(SU-27s 22대와 SU-27UBs 4대)를 운용하고 있는데, 이 전투기들은 남중국해에서 멀리 떨어진 상하이 서쪽 270㎞에 위치한 우후(Wuhu)에 기지를 둔 제3공군사단에 배속되어 있다. 또한 중국은 이미 1995년에 이 전투기를 자국내에서 라이센스 생산하는 것을 내용으로한 계약을 러시아와 체결했다(Kim 1998, 348; Chang 1996, 364). 나아가 중국은 1998년 12월 자체 기술로 폭격기를 연구, 개발하였으며, 이를 이미 해군에 실전 배치하여 운용중에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페이바오(飛豹)로 명명된 이 폭격기는 초음속에 항속거리가 길고 방어능력도 우수한 국제수준의 폭격기로 알려지고 있는 것이다(人民日報, 1998/12/23). 더욱이 현재 중국 공군은 공대공 및 지대공 미사일, 초정밀 유도탄, 발사통제시스템 등의 무기체계를 현대화했을 뿐만 아니라 전자교란 제어시스템과 공중재급유기까지 갖추고 있다. 이를 배경으로 최근 중국의 공군은 과거 방어위주의 전략에서부터 육․해군과의 합동작전을 포함한 공격형 전략으로 수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South China Morning Post, 1999/01/12).
3. 팽창주의적 해양정책의 실상
중국의 해양권익 보호를 위한 남진정책은 이미 1974년 1월 파라셀(Paracel) 군도에서 베트남을 축출하고 강제 점령할 때부터 예상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베트남이 패망하기 직전 미국의 영향력약화를 틈타 기습적으로 파라셀군도를 무력으로 장악함으로써 남중국해 진출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중국의 팽창주의적 영유권정책은 탈냉전과 더불어 미국과 러시아가 후퇴함으로써 더욱 노골화되었다. 1988년 2월 22일 중국해병은 캄란만에서 224㎞ 떨어진 피어리 크로스(Fiery Cross)환초(중국명 永署噍, 베트남명 Da Chu Thap)와 구아테론(Guateron)환초(중국명 華陽噍, 베트남명 Bai Chau Bien)에 상륙함으로써 중국과 베트남간의 영유권분쟁이 심화되었는데, 당시 중국은 2척의 구축함과 2척의 프리킷함으로 구성된 전투단 및 수척의 수송함과 푸칭(Fuqing, 福淸)급 군용유조선으로 구성된 지원단으로 베트남의 수송선 1척을 침몰시켰고, 다른 2척을 대파하였으며, 70여명의 베트남선원이 사망하였다(Spratly Island, June 1993, 28-30). 또한 동년 10월부터 12월 사이에는 중국해군이 남중국해와 서태평양을 순항하며 원양항해훈련을 하였고, 스프라틀리군도의 점령도서에 중국 국기를 게양하였으며, 이후 이 지역에 해군력을 증강시키면서 1989년 9월까지 이 군도의 6개 섬과 암초에 영유권을 표시하는 석탑을 건립하였다(South China Morning Post, 1989/08/03). 나아가 중국은 베트남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뱅가드 사구(Vangard Bank)에 대해서 1992년 6월 미국의 크레스톤사(Crestone Energy Corporation)에 석유탐사권을 부여하고 이 회사의 시추활동이 제약을 받을 경우 중국해군의 지원을 약속함으로써 베트남과의 외교분쟁을 격화시킨 바 있다(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2/06/19).
1995년 2월 중국은 필리핀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팔라완(Palawan)섬에서 170㎞ 떨어져 있는 미스치프(Mischief, 필리핀명 Panganiban)환초에 통신시설물을 설치하고 중국 국기를 게양함으로써 양국간의 외교분쟁이 발생하였다(FEER, 1995/02/23, 14-16). 또한 1997년 10월에는 미국의 대서양리치필드사(Atlantic Richfield Corporation)에 하이난 섬과 베트남 사이 해역에서의 석유 및 천연가스 탐사권을 허가함으로써 베트남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Straits Times, 1997/11/24). 뿐만 아니라 1998년 10월에는 중국 군함이 이곳에 군막사를 짓는 것이 발견되어 필리핀 공군이 부근해역의 봉쇄를 경고하였으나, 중국은 어민들의 대피소를 보수하고 있을 뿐이라고 강변하면서, 필리핀공군이 고도 1,515m 이하로 내려올 경우 무력충돌의 의도가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고 위협하는 등 강경정책을 고수하였다(Straits Times, 1998/11/11;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8/12/02).
그런데 중국은 이러한 팽창주의적 영유권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법적 조치를 취하여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중국은 이미 1992년 영해법을 제정하고 남중국해 전체의 도서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으며, 이 도서의 인근수역을 중국의 내해(內海)라고 선언하여 동 수역의 통과 선박에 대한 중국 당국의 허가권을 암시하였다(FEER, 1992/03/12, 8-9). 나아가 중국은 1996년 5월 15일 유엔해양법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을 비준하고, ‘중국의 영해범위가 기존의 37만㎢에서 3백만㎢로 크게 확대되었음을 천명’(Xinhua News Agency, 1996/05/15)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 분쟁중에 있는 스프라틀리군도와 파라셀군도의 전체를 중국의 영토로 표시한 새로운 공식지도를 발표하였다(Indonesia Times, 1996/07/24).
뿐만 아니라 중국은 남진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남중국해 도서 및 인근지역에 해․공군기지를 건설, 확장해 왔다. 중국은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남중국해를 무대로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면서 칭따오(靑島)항에 대규모 잠수함기지를 구축하였으며, 이어서 하이난섬에도 기동함대기지를 건설하였다(Newsweek, 1995/07/17, 8). 또한 외양에서의 제공권 확보를 위하여 하이난섬과 파라셀군도에 비행장을 건설하여 군 수송능력을 강화시켜 왔다. 중국은 1988년 스프라틀리군도에서 군사충돌이 발발한지 몇 개월 뒤 하이난섬 사냐(Sanya)에 비행통제소를 설립, 남중국해를 비행하는 국제민항기를 통제할 것을 밝히는 한편, 스프라틀리군도에도 동일한 통제소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China Daily, 1988/06/10). 그러나 하이난 섬의 해군기지는 남중국해의 영유권분쟁지역과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어서 문제였다. 왜냐 하면 스프라틀리군도에서 분쟁이 발발하였을 때, 중국해군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원거리까지 호위할 공군력의 지원이 필수적인데, 스프라틀리까지의 거리와 비행속도 등을 고려할 때, 중국해군의 지원능력이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Gallagher 1994, 178). 따라서 중국은 하이난섬과 스프라틀리군도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파라셀군도에 2,600m의 활주로와 항만시설을 구축함으로써 스프라틀리군도 등 남중국해 진출을 지원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필리핀 근해의 스프라틀리군도에도 군사시설을 확장하였다. 이에 대해 필리핀의 매르카도(Orlando Mercado) 국방장관은 중국이 구축해 놓은 헬기장, 레이더, 포대, 2개의 3층건물 등의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어민대피소의 건설과는 거리가 먼 명백한 군사시설임을 확인하고, 이를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하였다(Philippine Daily Inquirer, 1999/02/17).
한편 중국은 1997년 홍콩을 다시 돌려 받으므로써 경제적 측면에서는 물론이고 군사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역할, 즉 남진을 위한 천혜의 해군기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홍콩은 수심이 깊어 동아시아 최상의 해군기지로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다. 이와 관련하여 동경대학의 다께시 하마시타 교수는 “홍콩이 남중국해와 대만의 중간부분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앞으로 중국의 가장 중요한 군사 요충지가 될 것”(동아일보, 1997/06/07)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중국은 최근 장래에 남중국해 도서나 대만에서의 군사적 충돌에 대비하여 홍콩을 둘러싼 광동군구의 장비와 인력을 다른 군구 보다 우선해서 집중적으로 늘리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처럼 홍콩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작전능력을 향상시킬 지정학적 이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국은 홍콩 반환을 계기로 대만과의 재통일을 염두에 둔 남진정책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중국은 이미 홍콩이 반환되기 직전인 1997년 1월 당시 리펑 총리가 동년 ‘7월 홍콩의 중국반환 이후 조속히 대만과 재통일 할 것’(Denoon & Frieman 1996, 423)이라고 강조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대만의 분리독립 움직임과 관련하여 국방장관 치하오티안(Chi Haotian)이 “중국군은 중국의 주권과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리덩후이와 대만당국은 우리의 확고한 방침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 것”(Muzi Lateline News, 1999/08/02)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최근 중국은 대만과의 통일을 겨냥하여 대만해협과 그 주변에서의 군사훈련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완고한 대만통일정책 또한 그들이 장기적 안목에서 추진하고 있는 남진정책과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Ⅳ. 아세안의 인식과 대응
1. 아세안의 위협인식
소위 중국위협론의 본질과 정도에 대해서는 아세안 국가들간에도 지정학적 여건과 역사적 경험에 따라 다소 견해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탈냉전과 더불어 추진되고 있는 중국의 군사력증강과 남진으로 인한 아세안 국가들의 기본적 위협인식은 공통적인 것이다. 중국이 주장하는 중국위협론의 허구성이나 중국의 아세안에 대한 대화와 화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세안의 중국에 대한 우려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아세안 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우려는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들의 국가적 취약성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힘의 우열에서 비롯된 조공제도(朝貢制度)는 물론이고, 냉전시대를 통하여 전개되었던 ‘비공산 아세안국가들에 있어서 공산게릴라들의 반정부활동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지원’5) 등은 아세안의 중국에 대한 우려가 단순히 최근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이러한 아세안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우려는 기본적으로 이들의 국가적 취약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들은 중국과 비교할 때 영토와 인구의 규모, 군사력, 경제력 등에서 절대적 열세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아세안국가들의 안보에 대한 관심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러한 약소국들의 심리, 그들의 염원과 우려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Lee 1997, 258).
이처럼 역사적 불신과 국가적 취약성을 갖고 있는 아세안의 입장에서 볼 때 탈냉전과 더불어 노골화되고 있는 중국의 팽창주의적 영유권정책과 일방적인 영해권의 행사는 이들의 위협인식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은 남중국해의 모든 도서들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분쟁 도서의 강탈과 실효적 지배정책을 버리지 않고 있다. 파라셀군도의 강탈과 남진을 위한 활주로와 항만시설의 구축, 미스치프환초의 점령과 스프라틀리군도 일원에서 계속되어온 무력행사와 군사시설물의 설치는 영유권 분쟁 중에 있는 모든 아세안 국가들은 물론이고, 분쟁당사국이 아닌 아세안국가들 까지도 중국의 의도에 대해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 필리핀의 시아존(Domingo Siazon)외상이 “중국은 타국의 영토를 점령하면서 계속 우호적인 의도의 선언을 할 수는 없을 것”(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8/12/14)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의 이중적 태도에 대한 아세안의 불신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팽창주의적 영유권정책은 군사력증강과 더불어 점차 적극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세안의 우려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물론 중국은 자신의 방위비 증가와 군비현대화가 팽창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음을 강변하고 있다. 그들은 중국의 국민 1인당 방위비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며, 절대액에 있어서도 미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주요 유럽 강국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군대는 대규모이지만 대부분의 장비가 노후화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현대화하는 것은 당연한 중국의 주권이라는 것이다(Denoon & Frieman 1996, 426).
그러나 절대적으로 힘의 열세에 있는 아세안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중국의 주장이 아세안의 우려를 약화시키기는 어렵다. 우선 중국의 이러한 설명은 기본적으로 객관적 정보에 의한 투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공식 통계만 보더라도 중국의 1998년 방위비는 110억 달러로서 전년도의 97억 달러에 비해 13% 증가하였는데, 실제로는 이 수치의 약 3배의 방위비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1999년의 방위비는 126억 달러로서 전년도 보다 15%나 증가하고 있다(Muzi Lateline News, 1999/03/03;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8/10/23). 또한 이미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중국은 아세안을 우려케 하는 해․공군력의 증강에 역점을 두고 군비현대화를 추진해 왔으며, 그 결과 중국 해군은 1999년 현재 잠수함 63척, 구축함 18척, 프리킷함 35척 등의 주요군함을 보유하고 있으며, 공군은 전투기 2,556대, 지상공격기 400대 등을 보유하고 있다(Time, 1999/01/25). 이는 모든 아세안 국가들의 해․공군력을 합한 것보다도 많은 것으로서 군사적 위협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또한 최근의 ‘특수신속배치군’(special rapid-deployment forces) 창설 및 신형군함과 장거리 전투기, 공중재급유기의 도입, 그리고 항공모함의 건조 계획 등은 중국과 분쟁을 겪고 있는 아세안의 입장에서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아세안은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경제력이 궁극적으로 군사력으로 전용될 가능성에 대해서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발전을 아세안이 우려하고 있는 이유는 경제적으로 부강해진 중국이 더욱 공격적이 될 가능성 때문이다. 비록 아직까지는 중국이 인접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필요로 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중국의 주장은 그 강도가 더욱 강해질 것이며, 인접국가들에게 점점 더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Cable & Ferdinand 1994, 261 ; Bert 1993, p.331. : Segal 1994, 45). 따라서 ‘중국의 경제적 성장이 재정․산업․기술분야에서의 발전으로 연결되어 군사적 능력을 제고시키게 되면 보다 공세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지배적 패권을 확보하게 될 것이라는 가설’(Kim 1998, 359)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태국 부수상 비라반(Amnuay Viravan)은 “경제적 잠재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결합하여 강력한 힘을 얻게 될 것이므로 중국은 잠재적인 시한폭탄(potential time bomb)”(Straits Times, 1993/03/12)이라고 묘사한 바 있으며, 인도네시아 국방장관 무르다니(Benny Murdani)는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의 장기적인 의도에 대해 불신하고 있다”(Straits Times, 1993/03/12)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2. 아세안의 대응전략
1) 역내적 차원
아세안 국가들은 이러한 위협인식에 바탕을 두고 중국의 남진에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해 왔는데, 그것은 크게 나누어 아세안 내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응책과 아세안 외적 차원, 즉 중국 및 역외강대국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대응전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아세안 역내 차원에서 강구되어 온 대응전략들은 아세안의 ‘탄력성’(resilience)6)을 강화하여 대중국 견제력을 증대시키는데 초점을 두고 있는데, 여기에는 우선 아세안 회원국의 확대와 결속력 강화를 지적할 수 있다. 아세안은 탈냉전과 더불어 인도차이나 국가들과의 관계를 신속히 개선하고, 나아가 1995년에 베트남 가입을 시작으로 1997년 7월에는 라오스와 미얀마를, 그리고 1999년 4월에는 캄보디아를 가입시킴으로써 마침내 ‘아세안-10’을 완성하여 국제적 위상을 증대시키는 동시에 대중국 견제력을 강화하였다. 특히 동남아 최대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베트남의 가입은 “중국에 대한 항거를 염두에 둔 것”(楠石因 1996, 45)으로서 아세안은 이를 계기로 대중국 견제력을 상당히 제고시킬 수 있었고, 역사적으로 중국 남진정책의 최대 피해자인 베트남 역시 중국의 견제에 있어서 아세안이라는 지역협력기구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권문제로 서구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얀마를 가입시킨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는 미얀마의 친중국화를 저지하여 동남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막자는 데 있었다. 중국외교부 대변인 셴구오팡(Shen Guofang)이 “중국은 서구의 미얀마에 대한 제재와 압력에 동의하지 않는다”(Indonesia Times, 1996/07/24)고 밝힌 바와 같이 그 동안 미얀마 군사정권을 옹호해 온 중국은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동남아진출의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계속해 왔다(배긍찬 1997, 11). 아세안은 바로 이같은 미얀마를 통한 중국의 동남아침투를 견제하기 위하여 미얀마를 아세안의 일원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와 함께 아세안은 역내통합과 결속력의 강화를 위하여 정치․경제적 협력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기존의 다양한 역내협력 메커니즘을 활용함은 물론이고, 1993년에 시작된 아세안 자유무역지대(AFTA, ASEAN Free Trade Area)의 완성연도를 거듭 단축시켜 2002년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으며, 정치안보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1997년 이래로 정기적인 정상회담 외에 매년 비공식적인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또한 ‘하나의 동남아시아’(One Southeast Asia)라는 슬로건 아래 동남아공동체(Southeast Asian Community)의 건설을 위하여 1997년에는 ‘아세안 비전 2020’이라는 선언문을 채택하여 주제별 세부실천방안도 제시하고 있다.7) 물론 이러한 아세안의 역내통합 노력들은 급변하는 국제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거시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지역적 탄력성을 강화함으로써 중국의 남진을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 역시 중요한 통합촉진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세안 국가들은 중국의 위협에 대처하고 영유권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은 군사력임을 인식하고 해․공군력 중심의 군사력 증강에 노력하는 한편, 자신의 방위전략을 과거 내부방위와 게릴라전에 대비한 군사전략으로부터 주요 해상교통로를 보호하는데 초점을 맞춘 전략으로 전환하고, 군비현대화사업도 바로 여기에 입각하여 추진하고 있다(Business Times, 1994/02/02, 12). 군비현대화의 중점은 최신항공기, 주요기갑장비 및 화포, 첨단레이더체계, 고성능 미사일 및 전투함 등과 같은 현대무기의 획득과 신속배치군의 창설에 있으며, 특히 해양항공력을 포함한 해군력 강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인도네시아는 최근 12대의 M-8 헬리콥터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하였으며, 영국으로부터 24대의 호크(Hawk) 전투기, 그리고 독일로부터 2척의 잠수함을 비롯한 39척의 함정을 구입하였다. 또한 말레이시아는 미국으로부터 8대의 F-18 전투기와 러시아로부터 18대의 MiG-29 및 공격용 헬리콥터를 구입하였으며,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각각 2척의 레키우(Lekiu)급 프리킷함과 이태리로부터 4척의 아사드(Assad)급 코르베트함을 도입하였다. 싱가포르는 이미 사정거리 125㎢에 이르는 하푼(Harpoon)미사일을 장착한 6척의 빅토리(Victory)급 코르베트함을 보유하고 있고, 스웨덴으로부터 2척의 기뢰 탐지함과 4척의 잠수함을 구입했으며, 16대의 코우가르(Cougar)헬리콥터를 프랑스로부터 구입하였다. 그리고 브루나이는 1997년 최첨단 레이더를 장착한 프리킷함 3척을 영국에 주문하였으며, 베트남도 동년 러시아로부터 제2단계 Su-27전투기의 구입을 발표한 바 있다(SIPRI 1998, 326-366;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7/08/14; Dobson & Fravel 1997, 262). 또한 태국은 1997년 8월 동남아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스페인이 건조한 경항공모함을 진수시키고, 6대의 프리킷함을 구입, 해군력 증강을 꾀하고 있으며, F-5와 F-16 기종으로 편성된 공군력 제고를 위해 28대의 러시아제 전투기 등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8)
그러나 최근 아세안 국가들은 경제위기로 인하여 방위비가 크게 삭감됨으로써 무기구매의 취소 내지 연기, 군사훈련의 축소 등 군사력 증강에 상당한 차질을 빚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난을 겪고 있는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인도네시아와 태국은 이미 미국 및 러시아산 전투기의 구매를 취소했고, 말레이시아는 헬리콥터 구매계획을 유보하고 현대적 순찰함의 구매계획을 대폭 축소하였다(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8/10/23). 따라서 최근 아세안은 자체 군사력 증강보다는 안보외교를 강화함으로써 중국의 위협에 대처하는 전략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2) 역외적 차원
역내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아세안의 탄력성 강화 전략은 자신의 영유권을 보호하기 위한 자구노력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강대국의 위협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데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아세안은 이같은 자구노력과 함께 다양한 채널을 통해 중국의 행동을 온건화하고 상호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안보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이 지역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 등 역외 강대국들과 안보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중국의 남진을 저지하는 전략을 강구하고 있다.
아세안은 중국의 팽창주의적 영유권정책을 저지하고 남중국해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중국과 대화를 모색함에 있어서 양자주의(bilateralism) 보다는 ‘다자주의’(multilateralism)9)를 선호하였다. 왜냐하면 양자주의는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양자간 대화와 협상에 의하여 시시각각으로 다르게 대처해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협상력이 우위에 있는 강대국의 입장이 보다 효과적으로 관철되지만, 다자주의는 모든 국가들이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전제로 하여 참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중국해분쟁에 관련된 아세안의 약소국들은 양자간 협상에 있어서 중국에 외교적으로 압도당함으로써 협상의 결과가 불만스러웠던 전례가 많았으며, 이로 인하여 양자간 협상을 꺼려해 왔던 것이다. 반면에 양자간 협상이 오히려 유리한 중국은 남중국해분쟁을 공식적 무대에서 다자간 논의하는 것에 반대해 왔던 것이다(Snyder, 1996).
이러한 판단에서 아세안은 다양한 다자안보메커니즘 통하여 중국의 온건화를 유도하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해 왔는데, 그 대표적인 메커니즘은 인도네시아의 주도로 1990년이래 지속되고 있는 TrackⅡ 차원의 ‘남중국해 잠재적 갈등처리에 관한 워크숍’(Workshop on the Managing Potential Conflicts in the South China Sea)과 TrackⅠ 차원의 ‘아세안지역포럼’(ARF, ASEAN Regional Forum)이다.10)
아세안은 다자주의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 왔던 중국을 남중국해 워크숍에 참여시키고, 1992년 ‘남중국해에 대한 아세안선언’(ASEAN Declaration on the South China Sea)11)을 통하여 남중국해 연안국가들의 행동준칙을 마련하였고, 1994년의 제5차 워크숍에서는 그 동안 금기시되어 왔던 다양한 신뢰구축조치들이 논의되었으며, 1997년에는 남중국해에 있어서 과학적 협력프로젝트의 추진에 합의함으로써 분쟁당사국간의 신뢰구축을 모색하는 등 나름대로 의미 있는 대화를 진전시키고 있다. 나아가 아세안은 1994년 아․태지역 최초의 공식적 다자안보대화체인 ARF를 출범시켰는데, 그 중요한 창설배경 가운데 하나는 역시 전략환경의 변화에 따른 중국의 남진정책과 남중국해분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말레이시아 외상 바다위(Abdullah Badawi)가 ARF창설과정에서 “잠재적인 경제적, 정치적 초강대국인 중국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중국이 지역문제에 건설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아․태지역 국가들의 이익이 될 수 있다”(FEER, 1993/06/24, 13)고 중국의 참여를 강조한 데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아세안은 다자주의적 틀을 통하여 지역안보에 위협을 초래할 지도 모를 중국을 대화의 과정에 끌어들임으로써 협력적 행동패턴을 가지도록 유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Yahuda 1996, 285). 그 동안 ARF는 TrackⅠ과 TrackⅡ차원의 다양한 공식, 비공식회의를 통하여 남중국해분쟁과 관련한 많은 논의를 해왔는데, 중국이 점차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다자안보대화에 대한 기대를 증대시키고 있다. ARF회의를 결산하는 의장성명을 보면 항상 남중국해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는데, 최근에 개최된 제6차 ARF회의에서도 중국을 포함한 참가국들은 남중국해 분쟁을 국제법과 유엔해양법규약에 따라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할 것을 거듭 확인하였으며, 중국은 특히 현재 아세안이 추진하고 있는 남중국해에 있어서 지역국가들의 ‘행동규약’(code of conduct)의 제정 노력에 커다란 관심을 표명한 바 있다.12)
이와 같이 공식 및 비공식 메커니즘에서 이루어져 온 아세안의 다자간 대화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남중국해의 잠재적 분쟁에 대한 지역적, 국제적 주의를 환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해결하기 어려운 영토분쟁이나 관할권분쟁에 대한 평화적 협의와 협상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필리핀의 한 고위관료가 “중국과의 스프라틀리군도 외교의 목적은 중국의 남진을 방지하는데 있다. 나는 남중국해문제에 대해서 중국인들과 지속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그들을 대화의 장에 개입하게 한다면 현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얻는 것”(FEER, 1995/12/28 & 1996/01/04, 18)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아세안의 다자주의적 접근정책은 남중국해의 평화유지에 크게 기여해 왔다.
다른 한편 아세안은 이 지역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 등 역외 강대국들과 안보유대를 강화함으로써 중국의 위협에 대처하는 방안도 병행하여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아세안의 자체군사력 한계를 보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대국을 개입시켜 이 지역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함으로써 중국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을 제한하는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Gallagher 1994, 184). 더욱이 최근 아세안은 지속적인 경제위기로 인하여 자체 군사력 개발이 지연되고 있어서 중국과의 군사력 격차가 더욱 커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대국의 지원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아세안은 역외 강대국과의 안보협력을 점차 강화시켜 왔는데, 우선 싱가포르는 는 1992년 필리핀의 미군기지 철수 이후 ‘군사시설 이용 증대에 관한 각서’에 따라 미공군과 해군을 주둔시키고 있으며, 이후 현재까지 태국․브루나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가 항만과 활주로 또는 군훈련장소를 제공하여 왔으며 최근에는 필리핀까지도 다시 미국에 군사시설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싱가포르는 1998년 11월 현재 공사중인 새로운 해군기지를 미국이 사용하는 양해각서에 서명하였으며, 동년 12월에는 미항모 칼빈슨(Carl Vinson)호가 이끄는 일단의 전함들이 싱가포르에 최초로 기항하도록 하였다(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8/12/03). 또한 인도네시아는 1992년 6월 국영조선소에서 미해군의 함정을 보수해주는 협정을 맺었으며, 1995년 12월에는 중국과 영유권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나투나제도(Natuna Islands)의 천연가스전을 지키기 위하여 오스트레일리아와 군사협력협정을 체결하고, 공중조기경보기․인공위성․장거리추적레이더 등에 의한 전략적 수준의 감시체계구축을 모색하고 있다(Whiting 1997, 299-300; Gallagher 1994, 184).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영연방의 일원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와 함께 ‘5개국 방위협정’(FPDA, Five Powers Defence Arrangement)을 체결하여 자신의 안보를 도모해 왔는데, 1997년 4월에는 중국의 남진과 관련하여 남중국해에서 군함과 전투기를 동원한 사상 최대의 모의 공중 및 해상전투를 실시한 바 있다(조선일보, 1997/04/13). 이 훈련은 2차대전 이래 동남아지역에서 실시된 워게임(war game)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이를 통해서 새로운 전쟁전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필리핀 역시 “만약 스프라틀리분쟁이 확대되고 중국이 우리를 침략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지킬 것인가?”(International Herald Tribune, 1998/08/04)라고 한 에스트라다(Joseph Estrada)대통령의 인식처럼, 중국의 위협 증대에 따라 역외 강대국과의 안보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해 왔다. 필리핀은 1996년 1월 영국과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을 계기로 방위정보의 교환 및 군사대표단의 필리핀 방문 등을 골자로 하는 양국방위협정을 체결하였다. 또한 기존 미국과의 안보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1998년 2월에는 군대방문협정을 체결하였는데, 1999년 5월 의회 비준을 얻음으로써 7월에는 미군철수 이후 처음으로 미7함대가 다시 방문하는 등 상호군사협력을 강화하고 있다(Muzi Lateline News, 1999/07/22).
Ⅴ. 결 론: 중-아세안관계의 전망
이상의 논의에서 대체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중국이 탈냉전과 더불어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증거는 해양전략의 변화, 해․공군력의 증강, 팽창주의적 영유권정책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확인되고 있다. 물론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남진이 아니라 주권의 보호를 위한 당연한 조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강변할 수 있겠으나, 전통적으로 중국의 압력을 받아 온 아세안 약소국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다각적인 대응전략을 모색하여 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호작용 관계 속에서 향후 중국의 남진정책은 어떠한 형태로 추진될 것이며, 이를 둘러싼 중국과 아세안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이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전망을 해 보는 것으로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먼저 향후 중국의 남진정책을 전망해 본다면 장기적으로는 몰라도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남진을 위한 경제․군사력의 강화에 역점을 두면서 지금까지와 같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소극적인 형태로 추진될 것으로 보여 진다. 왜냐 하면 현 단계에서 중국이 본격적으로 남진정책을 추진하는데는 제약요인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우선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중국의 남진에 대한 아세안 국가들의 위협인식이 매우 크며, 이에 따라 아세안은 자체 결속력 강화는 물론이고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증강시키는 한편, 미국․영국․일본 등 역외 강대국들을 끌어 들여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 역외 강대국들이 대중국 견제에 있어서 아세안과 이해관계가 일치되고 있는 이상 중국은 이들과의 충돌까지 각오하면서 무리하게 남진정책을 추진하기는 어렵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그 동안 남진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해․공군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군사적 투사능력이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게다가 중국은 적어도 21세기 초반까지는 개혁․개방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국력을 신장시키는데 정책의 최우선 목표를 두고 있는데,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세안을 비롯한 주변국들과의 선린관계를 유지하는 등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대외환경이 필요하며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들과의 경제협력도 매우 긴요한 실정이다.
따라서 단기적으로 볼 때 중국은 무리한 남진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중국의 경제․군사적 근대화의 성공으로 강력한 힘을 보유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보다 적극적인 남진정책을 통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가고자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의 남진정책을 전망할 수 있다면 중국과 아세안의 관계도 당분간은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될 것으로 보여 진다. 물론 아세안의 중국에 대한 불신과 우려가 적지 않고, 남중국해 도서영유권은 주권문제로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긴장과 갈등이 조성될 수도 있을 것이나, 이것이 양자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는데 까지 발전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왜냐 하면 “현재 중국의 남중국해에 대한 전략적 이익은 아세안과의 전반적인 정치․경제적 관계에 비교해 볼 때 부차적인 것”(Shee 1997, 24)이므로 리펑 전 수상의 표현처럼 “중국은 남중국해문제가 중국과 아세안관계에 있어서 부담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The Star, 1997/08/23)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동안 중국과 아세안은 남중국해문제와 관련하여 양자간 및 다자간 채널을 통하여 상호신뢰구축에 노력해 왔을 뿐만 아니라, 서방의 인권압력이나 일본의 군사대국화문제 등에 있어서 양자가 인식을 같이하는 등 협력적 요인도 적지 않다. 따라서 가까운 장래에 중국과 아세안의 관계는 남중국해문제에 돌발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영유권문제는 당분간 미해결의 상태로 남겨 둔 채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의 수렴에 기반한 상호협력이 지속될 수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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