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 규제를 역이용한다


Pep Pills

언뜻 보기에 유럽의 의약품 유통업만큼 매력 없는 부문도 없다. 그러나 알리앙스 유니켐은 이처럼 이익률이 낮은 부문이라도 다시 눈여겨봐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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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사미르 베이바르스는 잉글랜드 셰퍼턴에 있는 자신의 작은 약국에서 아스피린과 후두염 치료제 같은 것만 팔지 않는다. 잉글랜드에서는 정부가 실질적으로 보건의료 산업을 운영하기 때문에 베이바르스는 정부의 의약품 마진 규제를 피해 추가 이익 창출에 나서고 있다.
베이바르스는 영국 국민의 건강문제를 총괄하는 국립보건청(NHS ·National Health Service)을 위해 비만도 측정 ·마약 중독 치료제 메타돈 조제 ·'사후'피임약 투여 등 틈만 있으면 ‘부가가치 서비스’도 제공한다.

그리고 한 번에 최고 130달러까지 정부로부터 추가 수수료를 받는다. 그는 의약품 중개상이기도 하다. 고객이 노바티스(Novartis)의 대상포진 치료제 팜시클로버(Famciclovir)를 찾으면 컴퓨터로 도매상 재고도 검색한다. 유럽 남부의 수입상이 보유하고 있는 177.54달러짜리 팜시클로버에 대해 NHS로부터 205.11달러를 환급받는다. 베이바르스는 대단한 수완가다. 약국 뒤편의 낡은 골방에서도 수입을 올린다. 지압사에게 연간 1만3,000달러로 임대하고 있는 것이다.

놀라울 만큼 장사 수완이 뛰어난 베이바르스는 자영업자가 아니다. 매출 170억 달러에 이르는 의약품 도매업체 알리앙스 유니켐(Alliance UniChem)의 피고용인일 뿐이다.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증시에 상장돼 있는 알리앙스 유니켐은 규제가 심한 유럽 보건의료업계 배후의 통합 세력이다. 범유럽 기업 알리앙스 유니켐은 5년 만에 독일 셀레시오(Celesio ·매출 230억 달러) 다음 가는 유럽 제2의 의약품 도매업체이자 유럽 제3의 약국체인으로 성장했다.

연간 매출증가율은 11%, 주당순이익(EPS)은 무형자산 상각 전 12%, 수치 그대로라면 8%나 껑충 뛰었다. 어쨌든 성장잠재력은 아직 넉넉하다. 미국의 경우 3대 의약품 도매업체가 시장 90%를 장악하고 있는 반면 유럽은 아직 67%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유럽 의약품 도매시장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 뒤에 스테파노 페시나(Stefano Pessina ·62)가 버티고 있다. 알리앙스 유니켐의 CEO 페시나는 이탈리아 밀라노 태생이지만 공식적으로는 모나코에 거주하는 것으로 돼 있다. 핵 공학자인 그는 알리앙스 유니켐의 최대주주로 10억 달러에 이르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시장조사업체 AC닐슨(ACNielsen)의 리서처로도 근무한 바 있는 페시나는 1970년대 중반 의약품 도매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아버지가 소유한 나폴리 소재 의약품 도매업체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페시나는 제대로 된 회계원칙을 도입하고 사분오열된 비효율적인 이탈리아 시장에서 비슷한 어려움에 직면한 다른 도매업체들도 매입하기 시작했다. 중복되는 사업부문을 제거하고 도매상의 소프트웨어와 자금조달 방식에 대해서는 중앙 집중화했다. 그러나 경영은 현지화했다. 페시나는 이탈리아 의약품 유통사업의 15%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어 프랑스와 남유럽 전역을 잠식해 들어갔다.

페시나의 최대 쿠데타는 97년 일어났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룩셈부르크 소재 알리앙스 상테(Alliance Sante)를 영국의 유니켐과 합병한 것이다. 이로써 범유럽을 아우르는 거대 기업이 탄생하게 됐다. 이후 지금까지 20억 달러에 550건의 인수를 마무리했다. 알리앙스 유니켐은 현재 포르투갈에서 노르웨이에 이르기까지 도매상 220개를 거느리고 있다.

유럽인의 평균 연령이 점점 높아져 현재의 38세에서 오는 2050년에는 50세로 치솟을 전망이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ABN암로는 의약품 잠재 수요는 물량 기준으로 연간 8~9%씩 꾸준히 증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유럽의 국가 의료체제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국가는 정기적으로, 어떤 경우 일시적으로 제약업계의 수익을 환수한다.

일례로 독일 정부는 제약업체들에 모든 특허 의약품과 특허 만료된 브랜드 의약품 값을 16% 할인하라고 요구했다. 적자로 허덕이는 건강보험제도를 위한 조치였다. 독일 제약업계는 이번 조치로 180억 달러 규모의 독일 의약품 시장에서 40억 달러나 손해 볼 것이라는 생각이다. 도매 매출도 급락할 전망이다.

호황기에 3~4%의 실질 성장률을 나타내고 이익률도 낮은 유럽시장은 매력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알리앙스 유니켐의 제프리 쿠퍼(Geoffrey Cooper) 부(副)CEO는 그것이야말로 핵심을 간과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알리앙스 유니켐의 핵심 역량은 단순한 물류에 있는 게 아니라 압수나 다름없는 부가세를 우회하는 데 있다. 물류의 경우 규제 없는 미국 시장이 더 첨단인데다 효율적이기도 하다.

알리앙스 유니켐은 최근 자체 일반 의약품 라벨이 붙은 200개 제품을 출시했다. 일반 의약품에 대한 유럽연합(EU)의 환급방식을 역이용하기 위해서다. 알리앙스 유니켐은 가격과 이익률 모두 정부로부터 규제받는 브랜드 의약품과 달리 일반 정가 의약품에서 규모의 경제로 이익률을 높일 수 있다.

“정부가 알리앙스 유니켐의 돈을 빼앗아가고 있다. 이것은 비즈니스 모델의 일부이지만, 알리앙스 유니켐은 규제를 활용하는 데 이력이 나 있다.” 쿠퍼가 던진 말이다.
2001년 프랑스 정부는 부가세를 0.45% 인상해 소급 적용했다. 당시 알리앙스 유니켐은 프랑스 정부의 ‘약탈’ 이후 7개 물류센터를 속히 폐쇄했다. 이는 노조와 노동자 협의회가 막으려 했던 일이다. 영국 정부가 약국 설립 자유화를 고려한 적이 있다. 알리앙스 유니켐은 경쟁업체들이 채 대응하기도 전 영국 내 병 ·의원 지도까지 작성해 비밀리에 좋은 입지 75%를 옵션으로 제시했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지난해 유럽 곳곳에서 의료비 환급액이 급감했다. 그러나 알리앙스 유니켐은 지난해 순이익증가율 10%를 기록한데다 시장점유율도 상승한 것으로 보인다.
알리앙스 유니켐과 유럽 국가들의 공생관계를 완전히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알리앙스 유니켐의 부채비율은 100%에 가깝다. 게다가 수취채권 중 25%를 증권화했다. 섬뜩한 수치다.

하지만 의약품의 최종 고객은 정부다. 따라서 유럽의 약국은 재정상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으며 법정관리에 들어갈 일도 없다. 알리앙스 유니켐의 부채가 정부 부채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 덕에 수취채권을 런던 은행 간 거래 금리(LIBOR)보다 겨우 0.35~0.65% 높은 수준에서 증권화할 수 있었다. 요컨대 EU의 간섭에도 알리앙스 유니켐은 안락함을 만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욕심 많은 알리앙스 유니켐의 다음 표적은 어디일까. 아마도 독일일 것이다. 유럽 최대 시장 독일에서는 현지 유통업체들의 담합을 둘러싸고 수사가 진행 중인데다 숱한 소송과 부가세로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독일 내 두 도매업체의 지분을 조금 보유하고 있는 알리앙스 유니켐은 독일 정부가 완전 인수만 허용하면 즉각 달려들 태세다. 그럴 경우 알리앙스 유니켐은 경쟁사 셀레시오의 뒤뜰까지 진출하게 되는 셈이다.
노련한 도박사 페시나가 자신의 패를 보여줄 리 만무하다. “유럽 시장 모두가 매력적이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던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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