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의 인간화’ 인간본질을 되묻다
| ||
관련기사 |
||
|
||
(왼쪽으로부터) 양현승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전자전산학) ·로봇, 인공지능, 가상현실 등 연구 ·국내 최초 인간형 로봇 ‘아미’(1999) ‘아미엣’(2002) 개발, 이족보행 로봇 개발 중 /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철학) ·몸 현상학, 예술철학, 매체철학, 하이테크놀로지철학 등 연구·저서: 등
인문의 창으로 본 과학의 풍경
①신화와 우주론
②유전자복제
③뇌는 마음을 얼마나 알까
④인간과 로봇, 몸의 철학
⑤인간, 동물 그리고 진화
⑥동양철학의 디지털문명답사
⑦수학과 미술의 물음, 아름다움이란
⑧우주개척시대, 지구 밖 인간의 존재
⑨나노과학과 미시역사의 눈
⑩세계와 입자의 근원
‘주체’라는 자유의지 향한 희망은
인간의 사회적 기계화의 딴 이름
몸은 예술·혁명으로 저항하지만
로봇진화는 인간진화 앞질러
미래는 오이디푸스적 비극 될까
프로메테우스적 불이 될까
인간이 되려는 기계의 의지는 어떻게 읽어내고 또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 걸까? 만약 21세기 인문학의 화두가 있다면, 그 하나는 ‘로봇의 인간화’ 즉 ‘기계의 인간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기계가 되려는 인간의 의지는 아예 없는 것일까? 근대 자본주의가 낳은 ‘주체’라는 낱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이 결코 기계일 수 없다는, 이른바 절대적 자유 의지를 향한 희망의 이름이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 까뒤집어 보면 사회라는 거대한 기계에 의해 강요되는 자기 최면적 기계화를 이르는 이름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인간이 기계가 되려는 사회적 욕망의 코드화는 이미 실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가 개발 경쟁에 나선 로보틱스(로봇공학)를 통해 ‘휴머노이드’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되려는 로봇의 개발이 한창이다. 이러한 ‘기계의 인간화’ 과정은 근대의 ‘인간의 기계화’를 이으면서 넘어서는 역사의 발전단계인 셈이다.
● 사실 지난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기계화는 생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몸을 끊임없이 공략해왔다. 말하자면 인간의 기계화는 인간의 몸을 최대한 전문적으로 쪼개어 한 가지 방향으로만 기형적으로 발달하도록 함으로써 각자의 몸, 곧 개개의 인간을 부품화해왔다. 이를 위해 감옥, 병원, 화장술, 우생학, 성형술, 다이어트 열풍 등을 동원하기도 하고, 정신의학이나 정신분석까지 동원하면서, 심지어 몸 속 깊숙이 숨겨온 무의식마저 철저히 코드화하여 사회적 기계의 부품으로 만들었다.
무의식마저 코드화
그러나 몸은 저항의 거점이었다. 사회가 비정상 또는 타자의 코드로 분류하는 각종 형태의 욕망들을 분출함으로써, 우리 몸은 때로 정치적 혁명으로, 때로는 아방가르드적 예술 행위로, 때로는 포르노그래피적 성적 일탈로, 때로는 정신분열로, 심지어 때로는 묵과할 수 없는 범죄 행위로 인간 몸의 기계화에 저항해왔다. 그런데 바야흐로 로봇 즉 기계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대해 인간의 몸은 과연 어떻게 저항할 것이며,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대덕연구단지의 중심인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의 전자전산학 연구동 앞 벤치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국내 로봇공학자 양현승 교수를 기다렸다. 열띤 로보틱스의 연구현장을 목격하고 로봇을 만드는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누면 평소의 의문을 풀 약간의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왠지 긴장되었다.
양 교수를 만나 함께 연구동 안으로 들어섰다. 약간 과장하자면 연구동에는 무슨 첩보영화에서 보듯 겹겹의 보안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책과 문서로 빽빽한 양 교수의 개인 연구실은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까지 함부로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치열한 경쟁 대상인 기술이 지닌 잠재력을 실감했다. 그저 책 냄새 아니면 술 냄새만 맡으면서 사는, 아무 국가적인 비밀도 없이 사는 나로서는 괜히 몸이 움츠려졌다.
잠시 인사를 끝내고 로봇을 직접 ‘창조하는’ 실험실이랄까, 공장이랄까 하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방 한가운데 세 ‘명’의 로봇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곳에서 함께 연구하고 있는 박사과정의 연구원들은 글쎄 뒤늦게야 눈에 들어왔다. 사람보다 인간을 닮은 로봇이 훨씬 더 관심을 끈다는 사실이 묘했다. 로봇이 주는 위압에 사람에 대한 예의마저 갖추지 못한 셈이었다.
● 중간에 턱 버티고 선 남자 로봇의 이마에 ‘AMI’(아미)라는 영문자 이름이 뚜렷히 새겨져 있었다. 옆에 서 있는 여자 로봇은 ‘아미엣’(AMIET)이었다. 아미엣은 아미보다 몸 동작이 훨씬 더 유연했다. 아미라는 이름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매체’(Media), ‘상호작용’(Interaction)의 영문 첫 글자를 따 만든 것이고, 아미엣은 ‘아미’에다 로미오의 연인인 ‘줄리엣’의 이름을 합쳐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설명하는 양 교수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번진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궁극적으로 로봇과 예술을 결합하는 데 큰 관심을 지니고 있었고, 이렇게 미학적으로 이름을 붙인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아미는 1999년에 처음 만들어져 2001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었고, 2002년에는 ‘열린음악회’를 비롯해 여러 방송국 프로그램을 때로는 아미엣과 함께 때로는 혼자 출연해 누비고 다녔고, 지난해에는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의 성화 봉송을 하기도 했으며, 올스타 야구대회의 시구식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야구공을 전달하기도 했다. 로봇은 말도 제법 알아듣는다. 감정도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고, 특히 아미는 150여명의 사람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눈빛이 너무나 강렬했다. 다만 ‘이족(두 발) 로봇’처럼 두 다리로 걸어 다니지 않고 바퀴로 굴러다닌다는 점에서 아직 인간을 덜 닮은 것이 아쉬웠다.
|
양 교수는 될수록 인간을 닮은 로봇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인간처럼 지각하고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인간처럼 행동하는 로봇, 이른바 탁월한 인공지능과 유연한 인공생명을 지닌 휴머노이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그는 ‘혼다 사피엔스’라 불리는 일본의 이족 로봇 ‘아시모’에 견줄만한 이족 로봇을 상당 정도 이미 만들어 놓고 있었다.
최근 한국과학기술원 오준호 교수 연구팀이 아시모보다 더 부드럽게 움직이는 이족 로봇 ‘케이에이치아르-2호'(임시이름)를 개발해 잠시 선을 보였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니 한국은 어느 새인가 이족 로봇 개발에서도 세계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양 교수는 로봇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로봇에 관련한 영화는 거의 빠짐없이 다 챙겨보는 듯했다. 그런데다 이야기 도중에 간간히 비치는 인간 자체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 자체로 철학적이라고 여겨졌다.
● 대담 뒤에 몇 가지 그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로봇의 처지에서 로봇을 만들고자 했다” “지금으로서는 사람은 로봇을 만드는 신이다” “21세기는 ‘후기생물 사회’다. ‘로보사피엔스’라는 종이 생겨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핵심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사이보그와 로보사피엔스 세상
그는 이미 로봇을 인간처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평소 인간에 대해 애정과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도덕률이 로봇에게 이관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후기생물 사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갖가지 인공생명체들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으며, ‘로보사피엔스’라는 이름으로 인격체인 로봇과 인간들이 함께 평등하게 상호 소통해야 하는 시대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로봇의 진화 속도가 인간의 진화 속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빠르다는 것을 특별히 지적했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인간은 인간과 기계가 합성된 ‘사이보그’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한 시대를 예견하고 있었다.
암시적인 ‘인간의 기계화’가 확장되어 이뤄지는, 명시적인 ‘기계의 인간화’는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여지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본래 인간의 몸은 세계 전체와 온몸을 이루면서 존재 전체의 울림과 떨림을 주고받는다. 로봇의 몸 역시 그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얌전하고 순종심 강한 인간의 도구로서만 남길 바라야 할 것인가? 로봇 공학을 둘러싼 인간의 운명적인 미래는 오이디푸스적인 비극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프로메테우스적인 또 하나의 불을 가져올 것인가?
조광제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