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의료제도

-중국의 의료제도①
한-양의학의 결합, 중체서용의 의학

면적 약 960만 평방 킬로미터(세계 3위) 인구 11억(세계 1위)의 거대한 나라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최근 시장경제를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으며 보건의료제도에 있어서도 여타의 사회주의권 국가들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유려한 역사적 전통 속에서 이미 하나의 체계를 구축해 온 중의학이 의료체계의 큰 축이 되어있는 것이나, 광대한 영토에서 인민들이 자치적으로 혁명을 성취한 전통을 바탕으로 지역자치적인 보건사업과 제도를 일구어 내어온 경험들은 주목할 만하다. 역사적, 사회적 배경은 다르지만 중국의 보건제도의 발전과정을 통해 민간 자본을 중심으로 공급자의 일방적인 선도하에 발전해 온 우리 나라의 의료제도에서 빠뜨리기 쉬웠던 원칙과 가치들에 대해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911년이전의 중국은 전통 중의학과 민간 의학이 보편을 이루고 있었으며 이후 서양선교사에 의한 서양 의술이 소개되었으나 1912년부터 1949년까지 (국민당과 공산당의 공존시대)에도 여전히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중국 전통의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국민당은 전통의학 말살 정책을 취했던 반면 공산당은 전통의학을 모든 질병 치료 영역에서 서양의학과 연결시키는 정책을 취하였다. 1931년부터는 중국 공산당이 대부분의 중국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보건 서비스의 계획이 공산당에 의해 조직되었다. 보건위원회가 성, 군, 읍 단위에 세워졌고 이들의 주요 임무는 환경위생을 개선하고 위생 교육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는데 있었다. 붉은 군대가 주둔하는 모든 마을은 우물을 파고 마을을 청소하는 등 지역 주민을 도왔다. 일본에 대한 저항을 시작한 1937년 이후에는 중국공산당은 전통의학으로부터 주술이나 다른 미신적인 경험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1950년대 초의 혁명 직후 북경의 '국가 보건의회'가 정책 발전을 유도하기 위해 만든 4원칙은 중국의 보건의료정책이 어떠한 관점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①의학은 사람들(노동자, 농민, 군인)에게 봉사하여야 한다 ②예방이 치료의학에 우선되어야 한다 ③중국전통의학은 서양의학과 조화되어야 한다 ④모든 보건관련 일은 집단 활동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계속 적용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 전통의학이나 서양의학 모두 의학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체계는 같지 않다. 이러한 면은 교육, 진료, 연구의 과정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교육면에서 살펴보자면, 현재 중의학원에서는 30%를 서양의학 교육에 할애하고 있고 의학원(서양의학교육기관)에서도 똑같이 30%정도 전통의학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강력한 중서의 결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 교육 현장에서는 교육의 핵심이 되는 중국 전통의학 이론을 서양의학 이론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즉, 서로를 관련시켜 교육하는 경향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의사중에는 西學中으로 불리는 서양의학을 공부한 후 다시 중국 전통의학을 공부하는 의사들로 있는데 이들은 중의학원 부속병원의 각 병동에 각 1명 정도 배치되어 중의사들에 대하여 서양의학적 자문을 해주고 있다.
중국의 중의원에는 출산을 제외한 거의 모든 환자가찾아온다. 입원환자 전원에게 서양의학적 병명을 붙이는 것이 그 기본 방침으로 되어 있으나 전통 한의학적 치료가 기본이며 양약으로 보충하는 형식으로 모든 질병에 대응해 나가는 것이 현장 진료의 실태이다.. 두개의 의학이 전혀 별개의 체계를 가지고 있어 접목하기 어려운 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의료의 모습은 中體西用의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 중국 보건의료 제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역에 기반한 의료체계 구축이다.

다음으로 중국 보건의료 제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역에 기반한 의료체
계 구축이다. 중국은 1990년말 현재 11억 3368만의 거대한 인구와 방대한 영
토로 인해 복잡한 행정구조를 가지고 있다.
혁명 후 초기 20년간 중국의 의료전달체계의 발전은 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
았다. 지방의 주요 읍 등에는 주로 작은 병상을 가지고 이동진료(ambulatory
care)를 하는 보건소가 있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소련의 policlinic처럼 성인
일반의, 소아과의, 부인과의가 갖추어져 있었다. 2차 의료 단계로 각 군에는
외과 치료나 다른 분과 치료를 위한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병원이 있고 省의
수도나, 틈 시에 교육, 연구, 복합 진료를 위한 의료원이 3차 의료단계를 담
당했다.
이러한 치료시설은 군단위 행정조직인 공중보건 행정국과 함계 지역 보건의
료를 담당하게 되었다. 공산당이 오랫동안 지배한 북중국은 군정부 아래에서
지방단위의 보건의료조직이 가장 발달하였는데 이것이 발달한 것은 1960년대
초부터 마을 산업이나, 농업의 지역생산단위가 인민자치구화 되면서부터이다.
이 지역 자치구는 특수한 목적의 생산체로 세분되었는데 경제적 기능뿐 아니
라 교육과 의료서비스 제공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체계화된 의료
조직은 70년을 전후하여 큰 변화와 발전의 전기를 맞게 된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문화혁명기간 동안 중국 사회는 거대한 변화의소용
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는데 보건의료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오는 1965년
6월 26일 '위생국은 주로 상류층으로만 구성된 15%만을 위해 일하고 있고,
반면 대다수의 농부는 의사도, 약도 없이 어떤 치료처치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생국은 그 이름을 도시 보건국, 또는 상류층 보건국, 도시상류층
보건국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비판을 했다. 극단적인 과장이기는 하지만 농
촌보다는 도시가, 노동자보다는 지식인 계급이, 예방의학보다는 치료의학이
더 존중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문화혁명 기간동안의가장 큰 성과를 꼽
는다면 barefoot라고 불리는 보조 의료요원의 범국가적인 발달이다. 7년과정
의 소학교를 졸업하고(혹은 하지 않고) 간략한 기본훈련을 받은 이들 기초의
료노동자는 시간농부나 노동자이면서 의료활동이 필요할 때만 시간제로 근무
하였다. 도시에서는 barefoot doctor에 상응하는 red medical workers로 불리
는 훈련된 가정 주부가 양성되었다. 이들에 의해 마오와 맑스의 정책인 '치
료보다 예방'을 실천하게 되었으며 예방에는 위생교육과 피임약 복용을 포함
하고 있었다. 1970년대부터 '1가족 1자녀 갖기'를장려하는 정책이 추진되었
고 지역사회 의료노동자들은 피임교육과 기구의 보급을 자신들의 정치적인
임무로 여겼다. (여성과 어린이의 건강증진은 중국보건서비스의 중요한 기능
중의하나였으며 실제로 전후 30년 후에는 여성의 건강상태가 크게 증진되었
다. 신중국 건국시 1천 명당 1백 50명이던 것이 1991년 1천명당 5명으로 떨
어진 모성사망률만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 barefoot doctor는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개발
도상국에서 중국의 보건인력 모델을 모방하였다. 이들은 경제개발을 우선 순
위로 하고 있기 때문에 최소의 비용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대안으로 중
국의 보건인력체계를 선택하였을 것이다.

중국 정부의 노력과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과정에서 자생한 공동체
적인 의료체계는 예방중심의 의료와 지역사회에의 기반을 둔 것이기는 하나
국민소득 자체가 매우 낮아 국민들이 (특히 인구의 9할을 차지하는 농민들)
받을 수 있는 의료서비스의 수준은 매우 조악하다. 등소평과 강택민 체제로
바뀌면서 자본주의의 침습과 함께 자유경쟁과 상업주의에 입맛이 길들여지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이러한 사회적 원칙과 제도들이 얼만큼 중요한 가치로 지
켜질 지는 또한 세대의 역사가 지나보아야 알 것이다.
많은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조그만 밥공기라도같은 크기의 숟가락으로 서로
를 먹여주는 중국의 지역보건의료제도가 우리 국민에게 주는 가치는 의료서
비스의 양보다도 의료철학에 대한 위정자들과 국민들의 인식과 실천의지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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