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약이 알고싶다_35번째] 1500억 신약펀드? 정부가 쏟아올린 위험한 신기루

* 이미지는 AI가 생성한 것입니다.

 - 심판이 선수로 뛸 때, 그 부작용은 온전히 국민의 몫

 

보건복지부가 최근 1500억 원 규모의 '임상 3상 특화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대규모 자금이 소요되는 임상 3상 단계에서 '자금 절벽'에 시달리는 신약 개발 기업에 과감한 투자를 단행해, 글로벌 신약 개발을 선도하겠다는 취지다. 언뜻 들으면 국내 제약산업 육성을 위한 든든한 지원책처럼 들린다. 하지만 정부 진단의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약 개발 과정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정부의 설명은 선뜻 납득되지 않는다. 1980년대 이후 글로벌 신약 개발시장은 빠르게 금융화되었다. 이제 신약 개발은 순수한 과학적 혁신을 넘어 고도의 금융기법이 동원되는 금융상품으로 변모했다.

공적 자금을 바탕으로 신약 후보물질을 발굴한 바이오벤처가 임상 1·2상에서 성과를 내면, 초국적 거대 제약사가 벤처를 인수·합병(M&A)하거나 라이선스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완수하는 것이 신약 개발의 보편적인 '공식'이다.

상대적으로 성공률이 낮은 초기 임상을 무사히 통과해 가능성을 입증한 후보물질은 시장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즉 금융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신약 후보물질의 데이터가 확실하다면 임상 3상에 필요한 자금이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온다. 유망한 기업에 '지금 절벽'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예외는 있다. 개발에 성공하더라도 상업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소외 질환 치료제'의 경우, 임상 3상 도전은 '절벽'에 가깝다. 시장 논리가 외면하는 영역에서 개발의 공공성을 평가하고 공적 자금으로 지원하거나 민간 투자를 유인하는 정부 역할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이번 특화펀드는 개발 공공성이 아니라 수익성을 위해 마련되었다. 정부는 결국 특화펀드를 통해 민간 금융시장에서 투자받지 못하는 신약 후보물질에 정부가 마중물을 대주겠다고 나서는 형태다. 이는 국민을 요행에 기댄 투자로 내모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심판'이 선수까지 겸하는 불공정 경기

제약시장은 본질적으로 규제산업이다. 아무리 뛰어난 약이라도 시장에 나오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건강보험의 적용을 받으려면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깐깐한 심사를 거쳐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효과가 다소 불분명하더라도 규제기관의 문턱을 넘어 건강보험 급여에 높은 가격으로 등재되기만 하면 불티나게 팔릴 수 있는 곳이 바로 제약시장이다. 시장의 선택보다 '규제기관의 선택'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이유다.

그렇기에 규제기관은 의약품 개발 과정에서 누구보다 독립적이고 '엄격한 심판자'로 남아야 한다. 또한 심사 과정에서 심사자는 심사 대상 업체와 조금의 이해관계만 얽혀 있어도 심의에서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정부가 특정 신약 개발에 수백억 원의 공적 자금을 직접 투입하는 순간, 이 원칙은 무너진다. 자신들이 밀어준 약이 심사에서 퇴짜를 맞거나 시장에서 실패하면 정책 실패의 책임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건당국이 투자한 신약을 보건당국이 심사하고, 급여를 결정하고, 약가를 정하는 구조에서 아무리 "과학적 근거에 따른 결정"이라고 주장해도 신뢰받기 어렵다. 우리가 이해충돌 방지 규정을 만드는 이유는 심사자의 도덕성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구조 자체가 편향을 만들기 때문이다.

'심판'이 선수까지 겸하는 불공정 경기 속에서, 정부가 책임져야 할 건강보험의 재정 건전성과 환자의 안전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해외 규제기관도 한국 보건당국의 결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규제기관의 공정성 자체가 국제 무대에서 의심받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정부의 'K-마크'가 만들어낼 신기루
 

의약품 개발은 임상시험에 도전하는 100개의 후보물질 중 1개 정도가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험난한 과정이다. 하지만 한국 바이오 주식시장에서 제약기업의 '임상시험 승인' 소식은 종종 대형 호재로 둔갑하곤 한다. 식약처는 특별한 결격사유 아니면 임상시험을 승인하고 있음에도, 식약처의 '승인'이 일반 투자자들에게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정부가 투자한 신약'이라는 타이틀까지 붙는다면 어떨까? 그 어떤 공시나 뉴스보다 강력한 '초대형 호재'로 둔갑할 것이며 시장의 눈을 멀게 할 것이다. 정부가 투자했다는 사실 자체가 부실한 데이터마저 그럴듯한 혁신으로 포장해 주는 일종의 'K 마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착시현상이 일으킨 뿌연 먼지 속에서 화려한 신기루를 좇는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이 맹목적인 투자에 나설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문제는 이 신기루의 유통기한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이다. 임상 3상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 드는 순간, 거품은 처참하게 꺼질 것이다. 국가가 판을 짜고 투기를 부추긴 결말은 소수 자본의 배 불리기와 선량한 개인 투자자들의 참혹한 희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의약품 개발과 보건의료 시스템 안에서 정부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무겁고도 많다. 규제의 독립성을 지키는 것, 소외 질환 환자들의 치료제가 개발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투기적 바이오 주식시장에서 개인 투자자를 보호하는 것 등 말이다.

보건복지부의 이번 임상 3상 특화펀드 조성은 철없는 성과주의가 빚어낸 촌극에 가깝다. 정부가 직접 수익을 좇는 '신약 투자자'로 나서는 일만큼은 당장 멈춰야 한다. 그것은 간절한 환자들과 공정한 규제 시스템, 그리고 평범한 시민 모두를 기만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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