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약사 '캐시카우' 된 불필요한 약... 제도 축소로 재평가 어려워져
"약방에 감초"라는 말이 있다. 한약을 지을 때 빠지지 않는 감초처럼, 한국 의료기관의 처방전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약이 있다. 바로 소화기관용 약, 쉽게 말해 위장약이다. 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전체 국민의 무려 84%가 소화기관용 약을 처방받았다. 전 국민이 위장병 환자도 아닌데, 도대체 왜 우리는 식사 후 디저트처럼 위장약을 달고 사는 걸까?
한국에 위장병을 일으키는 감염병이 창궐한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만연해 온 위장약 처방의 진짜 이유는 '끼워팔기'식 처방 관행에 있다. 주된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약에 습관적으로 소화기관용 약을 얹어주는 것이다.
최근 독감과 감기 유행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들의 처방전을 살펴보자. 해열제나 기침약 사이로 위점막보호제나 위산분비억제제가 슬그머니 끼어있다. 실제로 '급성 상기도 감염(감기)' 환자 4명 중 3명에게 소화기관용 약이 동반 처방된다는 통계는 충격적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처방 관행이 대부분 의학적으로 필수적이지 않은 '허가 초과(Off-label)' 사용이라는 점이다. 일부 약이 소염진통제(NSAIDs)를 장기 복용할 때 위염을 예방하는 목적으로 허가받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단순 감기약이나 다른 약물 복용 시 위장약을 예방적으로 처방하는 것은 약의 허가 사항에 없고 의학적 근거도 매우 빈약하다.
1조 4천억 원, 위장약 공화국의 청구서
한국에서 소화기관용 약은 의약분업 이전부터 항생제와 함께 가장 많이 오남용되는 품목이다. 오남용에 대한 국민의 안전과 사회적 비용 문제는 자주 지적되었지만 오랜 기간 해소되지 않고 있다.
흔하게 처방받는 프로톤펌프억제제(PPI)를 보자. 장기간 복용 시 두통, 설사가 발생할 수 있다. 칼슘 흡수를 방해해 노인 환자에게 고관절 골절 위험을 높이거나, 약을 끊었을 때 위산이 더 많이 나오는 '반동성 과분비'를 유발할 수 있다. 약이 또 다른 병을 부르는 셈이다.
비용 문제 또한 심각하다. 2023년 한 해 동안 소화성궤양용제 처방에 지출된 건강보험 재정은 1조 4000억 원에 달한다. 처방량으로 따지면 국민 1인당 평균 165알을 삼킨 꼴이다. 그 외 정장제나 위장관 운동 조절제, 진경제, 기타 소화기관용 약을 합치면 훨씬 큰 금액이 될 것이다. 2030년까지 누적 30조 원의 건강보험 적자가 예상된다고 하면서도, 효과가 불분명하고 국민 안전을 위협하는 위장약에는 여전히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한국의 위장약 과다 사용 원인으로 맵고 짠 음식을 즐기는 한국 특유의 식습관을 꼽는다. 여기에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빨리빨리' 문화가 위장을 병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기형적인 처방률을 설명할 수 없다. 더 중요한 원인은 제약산업의 구조적 문제에 숨어있다. 한국 제약사는 신약 개발보다는 만들기 쉽고 수요가 확실한 소화기 약물, 특히 '방어인자 증강제(점막 보호제)' 개발에 열을 올렸다. 복제약(제네릭)을 만들어 병원에 영업(리베이트)하기 가장 좋은 품목이 바로 위장약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수십 종의 위장약이 한국에만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외 교과서나 진료 가이드라인에서 치료 효과가 명확하지 않다고 평가하는 '점막보호제'가 한국에서는 'K-위장약'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제약사 '캐시카우'를 넘어 국민 건강 관점에서 제도 다뤄야

▲위궤양 치료제 약품비는 지난 6년간 평균 12.2%씩 증가했다. AI생성 이미지.오마이뉴스
지난 5년간 해외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약 중 일부가 '급여적정성 재평가'라는 제도를 통해 새롭게 평가를 받았다. 재평가 대상 34개 중 8개 성분(레바미피드, 애엽추출물 등)이 소화기관용 약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임상 재평가에서 효능을 입증하지 못한 '설글리코타이드'에 대해 사용 중지 권고를 내렸다. 한국에서만 사용되는 불필요한 여러 위장약 중 1개가 퇴출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다만 2012년 조건부 급여가 결정된 뒤 14년 만에 퇴출이 결정되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앞으로는 이처럼 한국에서만 잘 나가는 약의 재평가가 어려워질 듯하다. 지난해 11월 보건복지부가 '급여적정성 재평가' 제도를 주기적인 재검토에서 '외국에서 재평가에 착수'했거나 '학회 및 전문가로부터 재평가 필요성이 건의된 약' 등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만 이뤄지는 방식으로 축소 운영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제약산업 육성이라는 미명 아래 제약사의 '캐시카우'를 지켜주느라 국민의 건강과 건강보험료는 나 몰라라 하는 꼴이다.
위궤양 치료제 약품비는 지난 6년간 평균 12.2%씩 증가했다. 생활 물가와 아파트값 상승으로 신음하는 국민에게 불필요한 약값 부담까지 지우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정부는 위장약 거품을 걷어내기 위한 방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제약사나 전문가에 맡겨 놓지 말고 공공이 불필요한 약을 퇴출시키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속'을 편안하게 할 진짜 처방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