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관기]
중앙대학교 제약학과 5학년 김연진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 전시에 처음 들어서면 마주치는 시계가 있다. 11시 2분에 영원히 멈춰있는 시계이다. 녹아서 휘어지고, 빗살이 튀어나온 모습이다.
원폭 자료관에 전시된 원폭이 투하된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에 멈춘 시계(제공=김연진)
나가사키 원자폭탄이 작렬한 날, 1945년 8월 9일의 모습은 끔찍했을 것이다. 폭풍은 근방 1km를 모두 쓸어버리고 30초 후 11km 떨어진 곳에 이르렀다. 버섯구름은 빠르게 상승하여 8분 30초 만에 상공 9,000m 높이에 도달했다. 폭발 단 3초 만에 3,000도에서 4,000도에 이르는 고열이 지표를 감쌌다. 폭발 지점의 건물은 존재했었냐는 듯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고, 사람들조차도 재가 되어 사라졌다. 살아남은 사람조차도 열에 그을리고 살이 녹아내려 사람의 모습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최소 7만4천여명이 사망했고, 7만 3천여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강력한 폭풍, 열선, 방사선은 한 마을을 그렇게 앗아갔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를 참여하기 위해 나는 나가사키에 왔고, 80년 전 있었던 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가사키 방문 첫날 나는 ‘피폭 체험의 계승과 미래’라는 행사에서 피폭자의 생생한 증언과 피폭자 운동의 역사를 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사진이 있다. 첫 번째는 빨간 등의 소년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폭발의 충격에 40m를 날아가 떨어졌다고 한다. 등에 심각한 화상을 입어 1년 9개월 동안 엎드린 채로 생활해야 했고, 눌린 가슴엔 욕창이 생겨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썩어 들어갔다고 했다. 3년 7개월 후에야 퇴원할 수 있었지만, 등에는 화상 흉터가, 가슴에는 갈비뼈가 드러난 상처가 남았다. 두 번째는 아기를 업고 있는 소년의 사진이었다. 죽은 동생을 업고 화장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폭으로 인해 가족을 잃고 가족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화장장으로 향해야 했던 사람들의 모습에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함이 느껴졌다.
2025 원수폭금세계대회 (제공=김연진)
2025 원수폭금세계대회 (제공=김연진)
“거리엔 널브러져 있는 시체와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가족들을 한순간에 잃고 시체라도 찾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녔다.” “상처에선 피가 흐르고, 피부는 걸레처럼 늘어졌고, 검은 물이 묻어났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었다” 라는 증언과, "내가 운이 좋았다는 죄책감, 알려야 한다는 책임감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는 피폭자들의 이야기는 내게 깊은 감정을 남겼다. 감히 공감할 수 없는, 동정보다는 내가 운이 좋았다는 부채감에 가까운 감정이 일었다.
전쟁의 참상과 한국인 피폭자를 떠올리다
둘째 날은 나가사키 평화공원을 방문하고, 원폭 유적지와 조선인 및 한국인 위령비를 보았다. 사람들이 고가고, 평화로워 보이는 이 공원이 8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에 우라카미 성당은 무너졌다고 한다. 원폭 투하로 나가사키 천주교 신자 12,000명 중 8,5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강한 열폭풍에 성당은 무너졌고, 성상은 그을렸다. 원폭이 투하되고 며칠 뒤 발생한 화재에 의해 50톤에 달하는 종루마저 무너졌다. 그을리고 부서진 석상이 남아 있었다.
원폭 당시의 지층을 살필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지층에는 일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발굴 당시 인골이 많았다고 한다. 이곳 나가사키 폭심지는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지층 옆에 흐르는 계곡물은 꽤나 시원해 보였다. 하지만 80년 전에는 피폭된 물을 마시고 쓰러져 그대로 물에 떠내려가는 시체가 가득했다고 한다. 다시금 나는 이곳에 '견학'이란 이름으로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이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곳에는 근처에 한국인 위령비도 세워져 있었다. 236만 명의 강제징용된 한국인 중 32만 명이 나가사키에서 일하고 있었다. 일본은 자국민뿐만 아니라 식민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쳤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가이드의 말에 모두 묵념으로 한국인 피해자의 넋을 기렸다. 한국에는 아직 피폭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2‧3세도 계신다. 위령비에 묵념을 하며, 그들을 위한 연대를 실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날 오후에는 오오츠카 씨의 피폭 증언을 들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날, 친구가 매미를 가리키는 순간 쿵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지고 땅이 흔들렸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후의 기억은 끊겼고, 정신을 차렸을 땐 건물 잔해에 깔려 있었다고 한다. 그의 동생은 괴사성 비염으로 질식사했고, 누나의 아이는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온몸이 암 투성이인 채로 사망했다. 피폭은 일순간의 사건이었지만, 그 피해는 지속적이었다.
그는 “일본 정부에 의해 당시 조선에서 강제징용 돼 온 사람들이 공장이나 탄광에서 일하게 되면서 피폭자가 된 경우가 있다. 국가의 설명과 시민단체의 추정치가 다르지만 최소 3만 명, 그 이상일 것이다.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분노를 느낀다. 한국에 사과하고 싶다. 너무 가혹하고 비인도적인 역사를 절대 잊을 수 없으며, 그런 일본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고 말하며, 한국인 피폭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가 사과해야 할 주체도 아니었고, 그 자리에 있던 우리가 사과 받아야 할 당사자도 아니었지만, 이루 말 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을 일으켰음을 인정하고 피해국에 사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평화를 향한 목소리와 역사를 마주하다.
셋째 날에는 나가사키 시민회관에서 세계 각국의 평화 목소리를 들었다. "핵무기 금지 조약은 당연한 일이다", "빈곤과 환경 문제를 무시한 채 핵무기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No more Hiroshima, No more Nagasaki, No more War" 등의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반핵·반전 평화운동에 민주주의, 성평등, 인권, 기후정의 등 다양한 의제가 더해져 많은 시민들과 여러 비전을 공유하고 다가갈 수 있었다. 내가 그동안 평화에 피상적으로만 알았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기도 했다. 이날은 중립을 표방하며 말을 아끼던 과학계까지 핵의 위험성과 평화, 인권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안전한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은 무엇일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후에는 인권과 평화 자료관에서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다시 한 번 마주했다. 이곳은 민간 비영리단체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가해자 역사를 깨닫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했다. 시작 전, 전시된 사진이 다소 충격적일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그래서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실제 마주한 식민지배의 참상은 너무 끔찍했다. 식민지 사람들을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전쟁이나 노동의 도구로 보거나 그냥 발에 치이는 쓰레기 취급을 받는 모습처럼 보여서 숨이 턱 막혔다. 중국의 난징대학살, 한국의 창씨개명, 강제징용, 위안부, 그리고 아시아 전역의 다른 피식민지 국가들이 겪은 피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가사키 인권평화 자료관에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무엇을 했는가?'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악행을 기록해 놓았다. (제공=김연진)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원폭이 있었기에 우리가 독립할 수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일본 시민의 피해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데 원폭의 당연성을 논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일본을 단순히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오츠카 씨가 피폭증언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원폭의 피해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해외 피폭자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 “그렇기에 저는 애초에 전쟁이 시작되지 않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지지한다”,“그 누구도 전쟁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일본이 가해자이면서 피해자,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원폭 자료관을 방문했다. 글의 시작에서 다룬 멈춰버린 시계 사진을 보았다. 원폭에 의한 피해와 핵무기의 역사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고 있었다. 폭풍에 파괴된 건물, 열선에 녹아내린 물건들, 켈로이드 흉터가 생긴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시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전했다. 방사선 피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피폭자들은 물론 그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져 언제 어떠한 증상이 나타날지 모른다.
핵무기 개발 역사와 전후 국제 정세, 세계 반핵 운동의 흐름을 보여주는 연대표도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현대 핵무기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핵탄두의 위력이 강해지고 미사일의 정확도가 높아진 현실을 보며, 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안전과 평화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핵, 반전은 세계 평화의 기본 조건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며
며칠 전 광복절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끔찍한 고통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전쟁이 없는 세상, 핵무기가 없는 세상, 모두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꿈꾼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평화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연대의 실천이다. 한국인 피폭자들의 삶과 증언을 이어받아 함께 행동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반전·반핵 운동에 힘을 보태는 연대가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이 계속되는 팔레스타인과 우크라이나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전쟁을 멈추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 또한 우리의 책임이다. 이러한 노력이 모여 다시는 전쟁과 핵에 의한 참사가 반복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https://www.gunch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85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