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약이 알고 싶다_14th]피임약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한국 사회

- 주변 시선 때문에 먹지 못하는 약... 한국만 왜 이럴까

 

가짜 약을 진짜 약으로 믿고 먹었을 때 실제로 효과를 경험하는 현상을 '위약효과'라고 한다. 이는 우리가 약을 단순히 생리적 효과를 위해 설계된 화학합성물질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약효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중요한 외부 요인으로 '사회적 편견'이 있다. 환자들이 약의 부작용에 대한 과도한 우려로 복용을 중단하거나, 주변의 시선 때문에 구매를 꺼리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사전피임약이 대표적인 예다. 근거 없는 부작용 때문에 논란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복용을 망설이는 사람도 많다. 왜 우리는 사전피임약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을까?

 

여성해방운동의 상징이 된 피임약

먼저 피임약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매일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사전피임약, 성관계 뒤 3~5일 사이에 복용하는 응급피임약, 그리고 한국에는 아직 도입되지 않은 유산유도제가 있다.
 

사전 피임약의 등장은 20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여성 해방 운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피임약이 개발되기 전, 여성들은 잦은 출산과 위험한 인공유산으로 건강을 해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임신은 여성의 사회 참여를 제약하는 큰 장애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에 맞서 미국을 중심으로 20세기에 여성들은 '원치 않는 출산을 하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 운동은 산아 제한(Birth Control), 가족 계획(Planned Parenthood), 재생산 권리(Reproductive Rights) 등 다양한 이름으로 표현되었다.
 

'산아제한', '가족계획'이 다르게 인식되는 이유
1920년대 이후 미국 재생산권 운동은 여성 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산아'제한'연맹과 가족'계획'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성경적 가치관에 따라 다산과 풍요를 신의 축복으로 여기며 피임을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이에 맞서 여성 운동가들은 의도적으로 '통제'와 '계획'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고자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이러한 단어들은 전혀 다른 맥락을 지닌다. 과거 군부정권 시절, 여성의 재생산은 국가의 인구정책 수단으로 도구화되었고, 이때 동일한 단어들이 사용되었다. 1961년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대한가족'계획'협회를 발족하였고 산아'제한'정책을 시행했다. 미국의 재생산권 운동에서 '제한'과 '계획'은 이성적 주체로서의 여성을 강조하는 반면, 한국의 인구 정책에서 이 단어들은 재생산을 통제 수단으로 간주하는 국가 권력을 의미했다. 즉, 같은 단어라도 역사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재생산권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피임금지법안들이 철폐되었고, 다양한 피임법이 등장했다. 그리고 1960년, 여성 참정권 운동가의 후원을 받은 생물학자 그레고리 핀커스는 최초의 사전피임약을 발명했다. 간편한 사용법 덕분에 피임약은 큰 인기를 끌었으며, 여성들은 고등교육을 받고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68혁명을 거치며, 서구사회에서 피임약은 성 해방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젊은 세대는 피임약을 통해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성을 추구하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피임약이 있으니까!"라는 구호처럼, 많은 여성들이 피임약 복용을 억압적 성 인식에 대항하는 상징적 소비로 받아들였다.

콘돔이나 자궁 내 삽입장치도 있었지만, 사전 피임약은 남성의 협조없이 여성이 스스로 몸과 재생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 주도적인 피임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피임약의 의미는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도입된 한국에서 사전피임약은 전혀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국가 주도 가족계획사업의 도구였던 피임약
 

기혼 여성의 방법별 피임실천율 (단위:%)출처: 가족과출산조사한국보건사회연구원(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재가공)


한국 사회에서 근대적 방식의 피임법은 국가의 산아제한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고 장려되었다. 피임은 개인의 성적 실천이 아닌, 국가의 재생산 통제수단으로 여겨졌기에 한국의 피임 실태는 정부 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1962년 정부의 가족계획사업 초기에 콘돔과 정관수술 등 남성 피임법이 주를 이뤘다. 그리고 1966년 사전피임약이 도입되었고, 보건소를 통해 거의 무상으로 보급되었다. 당시 고용량 호르몬제로 오심, 구토 등 부작용이 많았지만 이런 문제는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부터 정부는 개인의 자율성이 큰 콘돔이나 피임약보다 비가역적 피임법을 장려했다. 개인의 자율적 피임 실천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난관수술, 정관수술, 자궁 내 장치 등을 권장했다. 특히 난관 수술은 1977년부터 무료로 보급되어 2000년까지 주요 피임법 중 하나였다.

반면, 사전 피임약 사용은 매우 저조했다. 미혼 여성조차 경구 피임약보다 콘돔을 선호했다. 서구 사회에서 여성 주도적 피임법으로 여겨지는 피임약이 한국에서는 다르게 인식된 것이다. 이는 피임약 복용을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여기는 사회적 편견과 억압적인 성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국내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 사전 피임약은 고용량 호르몬제였음에도 사회적으로 부작용과 안전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산아 제한이라는 정책적 목표는 부작용 이슈도 막고 있었다. 그런데 훨씬 더 안전하고 부작용도 적은 저용량 호르몬제를 사용하기 시작한 2000년대 이후에는 피임약에 대한 오남용과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급변한 정부 정책의 변화는 불필요한 피임약 논란을 방관했다. 그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피임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 쟁취가 아닌 국가 정책의 도구로 자리해 왔다.

한국에서 여성의 '원치 않는 출산을 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는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졌다. 낙태죄는 1953년부터 존재했지만 실질적 효력이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한 '낙태 반대 운동 연합'과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결성되면서 낙태 단속 강화를 요구했고 임신 중절 시술을 시행한 병원과 여성을 고발했다. 정부는 저출산 대응의 일환으로 이들의 요구에 동조하였다.

특히 2016년에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위반한 의사에게 최대 12개월까지 자격정지조치를 할 수 있게 하는 '의료법 시행령'을 개정하겠다고 예고한 것은 일종의 낙태죄 부활을 예고한 것이었다. 여성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많은 여성들이 분노하였고, 형법상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 낙태죄 폐지 요구 운동을 '검은 시위'라고도 부른다. 2016년 10월 한 달 동안 수많은 여성들이 검은 옷을 입고 집회와 기자회견, 캠페인을 벌였다.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재생산을 인구정책의 도구가 아닌 인간의 권리로서 요구한 것이다. 2016년 '검은 시위'가 일으킨 물결은 2018년 23만 명이 참여한 '낙태법 폐지 및 유산유도약(미프진) 도입' 청와대 국민 청원과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었고, 결정문을 통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사회적 권리임을 확인받았다.

 

미프진 도입, 재생산권 쟁취 역사의 시작이다
 

2023년 12월 15일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안전한 임신중지약(미프진) 도입과 모자보건법 개정을 가로막는 보건복지부 규탄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연합뉴스


하지만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아직도 온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 국회와 정부는 모자보건법 개정을 통해 임신중지를 사회적 권리로 보장하는 제도를 마련하지 않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100여 개 국가가 사용하고 있는 유산유도제(미프진)의 허가를 수년째 반려하고 있다.

시민사회는 방치되고 있는 임신중지권 보장을 요구하기 위해 보건복지부에 항의 방문 및 의견서를 제출했고, 임신중지약 도입을 요구하는 식약처 대상 다수인 민원을 제기했으며, 국가인권위원회에도 같은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2024년에는 유산유도제 도입을 방해하는 식약처를 대상으로 감사원에 국민감사청구도 진행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이러한 사회적 요구를 묵살했다.

서구 사회는 피임약 도입을 통해 1960년대 여성 해방 운동을 쟁취했다. 그리고 피임약은 자기결정권의 상징이 되었다. 최근 임신중지약 미프진도 미국처럼 임신 중지권이 제한된 국가에서 재생산권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도 이제 재생산권 쟁취를 위한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오는 3월 5일 오후 7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릴 임신중지권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탄핵 이후에 열릴 새로운 사회에서 재생산권은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아직 도입되지 않고 있는 미프진의 허가가 상징적 사건이 될 수 있으며, 우리 모두가 이를 지켜봐야 한다. 약을 먹을 때 우리는 단순히 화학합성물질을 먹는 게 아니라, 약을 사용하는 시대를 함께 먹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마이뉴스 기사 링크: https://omn.kr/2cc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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