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기원 논쟁 다시 불꽃


한국사회는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을까 이른바 ‘한국의 근대화 기원’ 문제는 학계의 오랜 논쟁거리이자, 순수 학문적 시각을 넘어 이념적 태도와도 직결될 수 있는 민감한 주제이기도 하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은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대척점에 서있는 대표적인 학설이다.
일본의 경제사학자가 쓴 책을 둘러싸고 각기 시각을 달리하는 두 명의 국내 소장학자가 다시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숙명여대에 출강하는 주익종(경제학 박사)씨는 최근 일본 교토대에서 동아시아 경제사 분야를 맡고 있는 호리 가즈오 교수의 (1995)를 번역해 소개했다(도서출판 전통과 현대). 이에 대해 김인호 경성대 교수(한국사)가 지난해 12월 에 이 책에 대한 비판적 서평을 실었다. 이후 두 사람은 최근호에서 다시 반론과 재반론을 주고 받았다.

호리 교수는 책에서 “일본제국과 세계경제에 포섭된 식민지 조선경제가 공업화 및 자본주의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현대 한국의 공업화 및 경제발전도 그것이 계승 발전된 것이다”고 주장한다. 식민지 시기 조선은 급성장하는 일본 경제권 안에서 상품화와 시장경제화, 근대 기술·지식·제도 등이 도입되고 도시 지역 상공업 부문 노동력의 비중이 커지면서 회사 자본이 축적되는 등 사회 밑바닥에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성립했으며, 해방후 현대 한국의 공업화와 경제발전도 그 큰 흐름 속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호리 교수는 이 같은 결론을 위해 식민지 시기 동아시아에서의 조선의 위치와 조선 내 재생산 구조 및 시장조건, 일본의 전력업·전기화학공업·비료공업 등 대자본의 변화 추이와 조선총독부의 산업정책 등 방대한 자료를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김 교수는 서평에서 “(이 책이) 경제사적 이해만으로 본다면 높은 성취”라고 평가하면서도 “저자의 식민지성에 대한 인식은 황홀한 경제성장의 현재형에 압도돼 속류화된 채 기왕의 (식민지) 근대화론자의 출발점에서 함께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은이는) 동북아 지역내 분업 확충과 조선 내 사회적 분업의 확대를 자본주의화의 단서로 포착하고 시장적 요소를 (자본의) 원시축적의 중요한 토대로 파악”했으나 “그것은 오늘날 비교우위에 기초한 역내분업론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부차적이고 비자율적인 내발 요소”라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당시 조선공업은 양적으로 팽창했지만 ‘내실있는 발전’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며 “일국사적 관심과 이론을 해체한 동북아 차원의 논의가 단순한 자본주의화와 준선진국화의 환상을 심어주는 것에 그친다면 그런 인식은 올바로 ‘현재’라는 역사 속에 뿌리 내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일본책 ‘한국공업화’소개뒤
주익종박사-김인호교수 논쟁
“연구자 열린시각 필요”주장
“식민지배 합리화 우려”맞서


주씨는 이 서평에 대한 반론에서 “식민시기 공업화에 관한 종래의 연구가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겠다는 목표에만 몰두해 심층분석 및 함의 도출까지 나아가지 못했던 반면, 이 책은 20세기 세계사에서 두드러졌던 동아시아 역사의 역동성에 주목해,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단순히 한국을 수탈하고 파탄시킨 것은 아니잖은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치열한 실증작업을 통해 나온 성과물”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모리 교수의 연구에 대한) 한국 사학계의 평가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딱지붙이기식 매도 일변도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 책은 한국 근대경제사를 완전히 새로 구성한 최초의 연구서이지 단순한 ‘(성장론의) 재탕’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는 “속칭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쟁이 불모적인 것이 돼버린 까닭은 타인의 연구성과를 무시해버리는 천박한 태도 때문”이라며 ‘한국 공업화의 역사에 대한 연구자들의 열린 시각’을 주문했다.

김 교수는 이같은 반론에 대해 “서평의 뼈대는, 실증의 문제라기보다 호리 교수의 동아시아 담론이 또다른 형태의 식민지공업화 찬양이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무책임성을 합리화할 가능성이 높은 연구라는 우려”였다며 재반론을 펼쳤다. 그는 “일본인 학자의 연구성과는 우리가 충분히 섭취하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면서도 “그러한 실증과 화려한 자료복원에 현혹돼 역사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제약을 받을 수는 없다”고 밝혔다. 문제의 책은 ‘경제론’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역사라는 주제와 관련된 나름의 ‘역사서’이기도 한 만큼 역사적 시각에서 비판될 이유가 있으며, 바른 역사저술은 바른 역사의식을 배제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호리 교수는 동북아 담론의 원형을 제공하고 지역사·일국사의 탈구성과 모순을 동아시아적 틀 속에 녹여내 한반도의 20세기 왜곡된 역사를 희석화하려는 연구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두 소장학자의 논쟁은 겉으로는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주제서평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러나 엄밀히 들여다보면 ‘한국의 근대와 정체성’, 나아가 감정이나 명분을 넘어 학계 전체가 동의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정교하고 설득력있는 분석틀과 담론 생산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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