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0 여성들의 숙원사업, 제발 이 약 좀 줘라
12월 3일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 윤석열 퇴진과 사회대개혁을 외치는 집회의 열기가 뜨겁다. 국회는 계엄해제 이후 곧바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고, 시민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탄핵안 가결을 외쳤다. 7일과 14일에는 각각 1백만, 2백만 명(주최 측 추산)이 넘는 사람들이 여의도에 모여 '국민의 힘'을 보여줬고,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되었다.
11일간의 뜨거운 열기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집단은 20-30대 여성이었다. <연합뉴스>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14일 집회(오후 4시 기준)에서 20대 여성은 17.52%로 연령별, 성별 인구집단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30대 여성은 11.85%로 두 번째로 높았다. 20, 30대 여성이 이번 시국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2030 여성들이 정치적 목소리 높이는 이유
먼저 윤석열 정부의 무도한 패악질이다. 지난 기간 정부는 젠더불평등 문제를 개인화시켰고, 여성가족부의 역할을 무력화시켰다. 이태원 참사, 오송 참사 등 사회적 참사에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며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제왕적 남성성' 정치를 보인 윤석열 정권에 대한 분노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그라들지 않고 있었다.
두 번째는 페미니즘의 확장성이다. 각종 혐오적 방법으로 페미니즘을 비판했지만 그동안 여성운동은 성소수자나 장애인, 이주민, 난민 등의 문제에 목소리를 내며 소수자와 연대하는 활동을 이어왔다. 이번 집회에도 많은 여성들이 쿠팡 등 노동자의 산업재해, 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 이동권, 팔레스타인 지지 등 다양하게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세 번째는 능동적으로 힘을 합쳤을 때 승리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2016년 이화여대 학생들의 학내 시위에서 시작되었던 박근혜 탄핵과 촛불 집회가 그러했고, '낙태죄 폐지 운동(검은 시위)'도 그러했다.
2030대 여성이 중심이 되었던 낙태죄 폐지 운동
이번 윤석열 퇴진운동처럼 20-30대 여성이 사회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적이 있었다. 바로 낙태죄 폐지 운동이다. 2016년 보건복지부가 인공임신중절에 대한 규정을 강화하자 대한산부인과협회 등 산부인과 의사들은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거부하며 반발했다.이 같은 상황에 불안을 느낀 젊은 여성들이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집회에 나섰다.
2017년에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이라는 제목의 제안은 2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원에 동참하며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시민들은 인공 유산의 범죄화에 반대했고, 유산유도제 미프진의 도입을 촉구했다.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2019년 형법 제269조 1항 등 자기낙태죄 조항에 대하여 여성의 자기결정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21년부터 낙태죄는 무력화되었고, 임신중지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산부인과에서 임신중지 수술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유산유도제를 원한다
낙태죄가 사라지고 3년이 지난 현재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낙태', '임신중절' 등의 단어를 검색하면 병원을 홍보하는 사이트 및 비용 등의 정보를 알려주는 게시글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원하면 누구나 안전하게 임신중지가 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여전히 '미프진', '낙태약'으로 불리는 유산유도제를 찾는 사람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국제적으로 유산유도제를 보내주는 비영리단체인 '위민온웹(Women on Web)'은 불법유통이라는 이유로 정부가 2019년부터 사이트를 차단하고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유산유도제 구매를 신청하고 있으며, 여성단체 등도 유산유도제 구매를 문의하는 메일을 자주 받는다. 인터넷에 정품약을 판매한다는 광고글도 여전히 넘쳐난다.
낙태죄가 폐지되었음에도 왜 여성들은 허가조차 되지 않은 유산유도제 구매를 문의할까? 약물을 이용한 임신중지는 정말 괜찮을까?
전 세계 90여 개 국에는 있지만, 한국에는 없다?
한국에서 미프진으로 알려진 현재의 약물 임신중지 방법은 1988년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제약사 루셀 위클라프(Roussel-Uclaf)가 개발한 이 약은 출시되자마자 낙태 반대 집회로 인해 생산이 중단됐다. 그래서 처음에는 개발 코드명인 RU-486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가 여성의 임신중지권 보장을 위해 회사에 약의 생산을 명령하면서 유산유도제 사용이 시작되었다. 이후 중국, 영국, 스웨덴을 거치면서 약 사용이 점차 확대되었고 나중에 약의 특허 독점이 풀리면서 전 세계적으로 사용이 확대됐다. 세계보건기구는 2005년부터 필수의약품으로 지정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해 약물 도입을 권장하고 있다.
약물 임신중지는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직접 병원 방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중요한 임신중지 방법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국가에서 유산유도제가 위험하다는 편견 때문에 각종 규제를 통해 약물 임신중지를 제약해왔다. 하지만 팬데믹 시기 경험을 통해 다른 의약품처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위험하다는 편견을 제거하면 약물 임신중지는 이상적인 방법이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임신 초기에도 시도할 수 있으며, 안전하고 성공률도 98%를 상회할 정도로 매우 높다.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사용하는 자율적인 방식이고 비용도 비교적 저렴하다. 국제적으로는 자기 주도적으로 임신중지를 시도하는 형태의 임신중지 방법(Self Managed Abortion, SMA)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아직도 임신중지를 금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한국은 정부 수립때부터 임신중지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였고, 이를 시행한 여성을 처벌했다.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막아왔지만 임신중지가 사라진 적은 없었다. 2005년 시행된 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한해 임신중절 추정건수는 약 34만 건에 달했다. 그해 출생아 수가 43만 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정말 많은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2010년대 이후로 임신중지 여성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임신중지 수술은 점차 음성화되었다. 숨어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겉보기 숫자가 크게 줄어들고 있음에도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연간 2만 건의 임신중지 수술이 이뤄졌다고 한다.
낙태죄가 다시 부활한다고 정말 임신중지가 사라지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법적 처벌과 도덕적 비난이 공존해도 임신중지를 시행하는 여성은 계속 있다. 오히려 위험한 임신중지 시도를 증가시키고 그녀들의 건강을 해칠 뿐이다. 헌법재판소는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은 대립하는 권리가 아니라고 명시하였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여성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임신중지를 허용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여성이 필요로 하는 임신중지를 범죄시하는 처벌 조항 등 불필요한 장벽을 제거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유산유도제 미프진 도입도 마찬가지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입법을 핑계로 지난 4년 동안 유산유도제의 도입을 거절해왔다. 또한 누군가는 '더 쉽게', '더 마구잡이로' 임신중지를 할 것이라고 우려하며, 유산유도제 도입을 반대한다.
하지만 유산유도제 도입이 막혀있는 현재도 많은 여성들이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유산유도제를 구매하고 있다. 그로 인해 어디서 생산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는 약들을 사용하며, 카더라 식의 정확하지 않은 정보때문에 잘못된 방법으로 약을 먹거나 부작용에 미리 대처하지 못하는 문제를 겪고 있다. 약을 구하느라 지연되는 임신중지는 오히려 안전 문제를 위협하기도 한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은 큰 성과였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아프다. 보건복지부와 식약처는 하루속히 검증 가능한 유산유도제를 유통하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해야 한다.
탄핵정국 시기에 여성들이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일기장에서 농민들과 장애인들과 성소수자들과 이주민들과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녀들이 써 내려갈 이야기의 한 자락에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권리를 외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이야기도 쓰이길 바란다.